United Paradox역설의 연합에 관한 노트

노트#1
세계의 끝과 시작, 적대와 환대

한민족의 옛날 속담에 원수는 외나무 다리 위에서 만난다는 말이 있다. 그 다음 상황에 대한 속담으로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 속담이 유구한 이유는 상상의 몫을 남겨줬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같이 갔을까, 힘겨루기를 했을까. 적대와 환대의 사이에는 외마디 차이가 있을 뿐 아닌가. 그 차이에 있는 것을 상상이라 부른다면 생과 사는 얼마나 다른 상상의 길목으로 떠나는 사이인가. 외나무 다리 위에 두 원수가 마주보고 서있다. 60년이 넘도록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한민족이 찢겨진 서로를 겨누고 있다. 만일의 세계 위에 떠있다. 둘은 언제나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가능성의 세계는 언제나 지금 여기의 두 손에 달린 것 아닌가. 역설의 합은 외나무 다리 위, 원수를 대면하는 상황에서 벌어진다. 정전의 한복판에서 세계의 끝과 시작이 상상을 저울질한다. 어떤 중간 한반도.

노트#2
전쟁, 상징과 이미지 기계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더글러스 맥아더는 “군인은 다른 누구보다도 평화를 기원한다.”고 하면서 만약 미국 군대가 그와 함께 싸웠던 군인들의 기대를 저버린다면 죽어서도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의무, 명예, 조국이라는 세 단어를 벼락치듯 토해낼 것이라고 했다. 나의 아버지는 맥아더가 은퇴연설에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라고 한 말을 좋아했고 되풀이해서 들려주었다.

투키디데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전달한 페리클레스의 전사자 추도 연설은 국가주의의 전형이라 불리운다. 가령, 마지막 문장도 그와 같은 것을 설명한다. “절대 늙지 않는 것은 명예에 대한 사랑 밖에 없으며, 노인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것은 재물이 아니라 명예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전쟁이야기때문에 긴장과 불화를 겪으며 자랐고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냉소부터 하는 사람이 되었다. 상징이 항상 문제였고 색깔론으로 이데올로기를 처음 접했다. 분명, 전쟁은 상징과 이미지를 거래하는 기계다. 거기서 나는 눈뜬 장님이 되었다.

노트#3
어둠, 어머니 아버지, 전쟁이야기

민방위훈련을 하느라 등화관제를 실시하는 날은 아버지가 들려주는 전쟁 이야기를 듣는 날이었다. 배고픔의 공포, 방아쇠 오작동, 미군의 고마움, 공산당의 야만. 그러나 엄마의 기억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강건너 미군들이 천진하게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느닷없이 총소리가 날아들었다. 숨어있던 인민군의 저격으로 핏빛에 물든 파란 강물, 그 위를 흰 몽뚱이들이 떠내려간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인민군이 장백산 노래를 가르쳐 준다. 밤이면 사라지던 고구마따위 경작물들. 낙오된 미군이 있다는 걸 알아챈 이장은 마을을 점령한 인민군에게 고발했다. 미군은 곧 붙잡혀 처형당하고 말았다. 그를 찾아 미군 헬리곱터가 마을 상공을 끊임없이 선회한다"...

내비게이션 아이디의 리서치 과정 속에서 알게 된 것은 컨테이너 속의 뼈는 엄마가 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한국 전쟁기 민간인 학살은 인민군이 점령했던 지역에서 살아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부역혐의를 뒤집어쓰고 처형 될 수 있었다.

노트 #4
인민, 국민, 번안된 정체성

선거철마다 만사형통하는 종북 좌파 딱지, 모든 사유와 언어의 자유를 침탈하는 대립구도. 반공이데올로기의 지겨움을 질문하다가 보도연맹을 공부하게 되었다. 진실의 힘 재단에서 “의문사진실규명위원회”와 “진실과화해위원회”에서 일했던 한성훈 박사를 통해 배우게 되었다. 자료집을 받아보았다. 그 수많은 보고서는 지금 여기를 설명하는 진단서처럼 보였다.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에 대해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는 무엇인가를 찾고 있다. 자꾸 집착하게 된다. 나는 누가 나를 버렸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는데 지금은 내가 누군가를 잊었다는 것으로 찾아온다. 무엇이 죽었고 무엇이 사라졌는가.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눈 앞에 보이는 친구의 모습…”
헤어진 사람들은 어디에 살고 있고 이들은 누구인가. 국민과 인민, 친구와 동무는 어떻게 다른가. 그 '감정' 또한 다른가. 혹은 다르지 않을까. 나는 분단국가의 현실 속에 사라진 단어의 정의를 찾기 시작했다.
국민의 탄생과 인민의 실종, 혹은 인민의 형성과 국민의 유사한 집단화 과정. 선점과 번역의 문제.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와 함께 번안된 정체성이다.

노트#5
둘의 천만 번 헤어짐

공동체를 재현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미디어의 정보와 비디오, 그리고 오브제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또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과거와 미래뿐이다. 네비게이션 아이디 오프닝 퍼포먼스의 순간에 민간인 학살 피해자 유족들의 눈을 가렸던 검은 안대는 공동체의 경계선이다. 검은 안대는 미디어의 모자이크 처리처럼 양가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공격으로부터의 보호 기능, 인권 혹은 인질...
내가 보지 못한 사람들, 연합과 유대를 호출하며 시계 바깥에 존재하는 사람들.
검은 안대는 추상성을 반올림한다.

익명성과 미지의 장소에는 보고 싶어하는 마음으로 통일된 나라가 있다. 이산과 실종된 삶을 살고 있는 사회의 가슴에 숨어 있는 절반의 공동체. 1983년, KBS 남북한 이산가족찾기 방송은 분할 화면을 통해 두 얼굴을 클로즈업 했다. 나는 분할화면 거기서 천 만 이산가족이 아니라 둘의 천 만 번 헤어짐을 본다.

노트#6
치를 수 없는 장례, 배제된 삶

1950년 7월 9일 공주에서는 경찰과 군인에 의해 보도연맹원 200여명과 형무소 재소자 300여명이 적법한 절차없이 집단 학살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민간인 학살은 전 국토에서 자행되었다. 공산주의자 성향을 지녔다고 판단한 사람들, 부역혐의자들, 정치범들을 살해했다. 다른 학살 현장 골의 깊이도 그렇듯이 이 곳도 60센티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구덩이였고 유골들은 대부분 흩어져버려 뿌리에 엉겨붙어 있기도 했다. 경산, 진주 함평 등지를 찾아다녔고 전국 각지에 위령제가 1년 내내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도 그 때 처음 알았다. “진실화해위원회”가 밝힌 유해매장추정지는 167여 곳이며 그 가운데 17곳 만 발굴을 마친 상태에서 활동이 종료되었다. 치를 수 없는 장례. 왜냐고 묻고 다니다가 사람들과 같이 묻기 위해 컨테이너를 움직였다… 배제된 삶, 죽음. 제 3의 길에서 외나무를 만났다.

노트 #7
가해자와 피해자, 공동체 감각, 사람의 이름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정체성. 우리는 어떻게 가해자가 되는가. 어떻게 피해자가 되는가. 나와 우리, 국민의 범주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국가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죽음과 장소의 관계. 내비게이션 아이디를 준비하면서 점점 조여가던 이 질문들은 결국 외나무 다리 위로 올라설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거기서 뼈가 담긴 컨테이너를 만났다. 아이러니하게도 숫자였던 몇몇 사람들의 이름을 마침내 알게 되었다. 공동체 감각이란 서로의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 시공간에서 살고 있는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실종과 사망신고의 차이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했다.

노트 #8
장소, 죽음을 배워가는 삶, 신성성

예감, 컨테이너, 장소감 … 한반도 지도 위에 38선을 따라 자로 대고 선 하나를 그었다. 외나무를 놓았다. 한국전쟁은 북한과 남한이 어느 날 갑자기 동족을 쏴죽인 결과가 아니다. 나는 아직도 한국사회에서‘빨갱이, 종북 좌파 척결’등등의 수사학이 여전히 미디어에 등장하는 것을 보며 어떤 예감을 본다. 한국전쟁이 남겨준 유산. 일상은 언제나 증오를 물리적 폭력으로 응집시킬 대상을 찾는다.

장치를 고안해야 하는 당위성은 이러한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에 대한 열망 때문이다. 장소를 박탈당한 개인의 삶과 죽음, 배제된 자들의 기억은 어떻게 정치적 장치들의 재편성과 재고를 요구하는가. 여기서 국가란 무엇이고 공동체는 어떻게 단결하는가. 한국처럼 과거청산이 이뤄지지 않는 국가에서는 공동체의 범주 속에 사상적 정체성의 문제가 생과 사의 문제마저 가른다.

무덤없는 죽음들, 묻히지 않았으니 죽지 않은 자들. 누구의 뼈인지 알 수 없는 죽음들, 이것은 무엇인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장소를 가졌을 때이다. 그렇다면 장소를 가지지 못한 죽음은 인간답지 못한 죽음이다. 장례를 치룰 때 비로소 사람의 죽음이 되고 죽은 자에게 예의를 갖추면서 산 자는 비로소 자신의 죽음을 대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무엇이 인간에게 있는 신성성을 이끌어내는가. 죽은 자에게 장소를 내주면서 산자의 장소가 비로소 생기는 것, 그 관계 속에 환대가 있다. “인간의 자격”이란 무엇일까. 죽음을 배워가는 삶. 죽음을 알고 맞이하는 삶.

노트#9
자화상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생존자 채의진. 그는 매일 나무를 주우러 산으로 강으로 나선다. 그가 찾는 것은 사람을 닮은 나무 뿌리다. 아니 그가 찾는 것은 자연을 닮은 사람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한 것 같다. 개와 늑대 사이의 구분이 잘 되지 않는 시간, 채의진의 귀가길에는 잘려나가고 버려져있던 나무가지들이 그의 그림자처럼 따라들어온다. 그림자들은 물에 잠기고 볕에 말려져 지팡이가 되고, 목판이 되고, 현판이 되었다. 그가 자화상이라 이름붙인 나무 비에는 이렇게 씌여 있다.

자화상
한번도 웃어본 적이 없다/ 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다/ 웃음도 울음도 아닌 슬픔/ 그런 슬픔에 굳어버린 나의 얼굴

노트#10
잔존, 현상, 방송국

주체의 잔존을 현상하는 곳, 그 곳이 나의 United Paradox 방송국이다.

장 뤼 고다르는 영화나 TV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혹은 공간이나 시간 속으로 일 초에 스물다섯 장의 엽서를 보내는 것이라고 했다. 비 현실적인, 누구나이기도 하고 그래서 아무도 아닌 것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그것을 갈망하고 경제적이거나 심리적으로 다르게 만들어 내고 그것으로 살아가는 것, 지금보다 나은 것을 찾아 다른 곳에 가보겠다가 아니라 지금 내가 있는 여기에서 다른 곳이 가져온 것을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노트 #11
예술, 죽음을 대면하는 능력, 이미지의 흔적

방송국은 중립을 지키겠다고 표명한다. 이건 무슨 뜻일까. 중립의 시계는 어디의 몇 시인가. 중립은 어떻게 소통을 이루는가. 전쟁 이야기는 언제나 살아남은 자들의 서사다. 대중이란 무엇인가 <역설의 연합체> 는 슬픔으로 유대하는 어떤 공동체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이다. 관흉국이란 가슴에 구멍이 뚫린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중국 최초의 지리서에 나오는 나라이다. 나는 동쪽에 있다는 그 나라가 슬픔으로 인해 통하는 역설적 공동체라고 말해왔다. 슬픔이 낸 구멍 너머에 타자의 얼굴이 있다. 한국 사람들은 슬픔의 아픔을 ‘가슴에 구멍이 나버린 것 같다’고 표현한다.

미국인들에게 이라크 전쟁 당시의 CNN과 9.11테러 당시의 이미지가 흔적을 남겼다면 내 기억 속에는 세 번의 미디어 이미지가 흔적을 남겼다.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례식 방송, 1983년 남북한 이산 가족 찾기 생중계 방송, 그리고 1984 굿모닝 미스터 오웰 백남준 위성생중계 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례식 장면과 마찬가지로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장례식에서도 카메라는 클로즈업을 하고 눈물을 추적했다. 분단된 두 국가는 따로 또 한번 닮은 듯이 울었다. 절반의 가능성은 방송현장의 움직임과 구성요소에 주목한다. 카메라, 스크린, 조명 스탠드 등을 뒤틀린 나무 뿌리 같은 자연에 결합시킨 오브제는 뉴스의 범주를 뒤섞으면서 절반의 공동체를 호출한다.

유나이티드 패러독스 방송국은 계를 달리하는 방송국이다. 역설의 연합뉴스는 방송국에서 허락하지 않는 우연과 충동을 허락한다. 슬픔과 고통을 증언하는 말없는 사물들이 ‘밝힐 수 없는 공동체’의 사연을 전달한다. 원초적인 것을 대면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던지는 초현실주의 방송국 같은 것. 김정일 전 북한 지도자의 장례식에서 카메라가 포착한 집단 슬픔의 연출 형식을 보면서 과연 이 눈물은 모두 백프로 거짓인가 하는 질문이 떠올랐다. 누가 그 슬픔을 모두 연출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가. 역설의 연합체는 산 자의 죽음이란 무엇일까를 질문하면서 떠올린 제목이다. 예술은 죽음을 대면하는 능력과 맞닿아 있다. 그런데 죽음은 어느 누구도 경험한 것으로 돌이킬 수 없다. 곧 죽음은 생성 과정에 결합되어 있다. 이미지처럼.

2014년 5월 United Paradox 임민욱 개인전 메모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