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확실한 삶_애도와 폭력의 권력들 | 주디스 버틀러·경성대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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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혹자들은 페미니즘을 언급하고 소수자 이론을 펼치면 한물간 타령이라며 냉소하기도 했다. 철지난 민주주의 논의가 있을 수 없듯이 공동체적 삶과 인간 개념을 어떻게 정리만 하고 스타일로 치부할 것인가.

9·11테러 이후 서구의 이성중심, 합리주의가 국가주의와 담합하면서 폭력과 공격을 정당화하자 성적 소수자인 버틀러는 누구의 죽음이 애도할 만한 것이고 또 아닌가로 집요한 질문을 던졌다. 신체라는 공통된 취약성을 통한 인간 개념과 타자의 불확실함에 대한 이해를 얼굴을 통해 출발시키는 역발상이었다.

레비나스를 통한 이 얼굴의 사유는 상처와 슬픔이 타인의 흔적이자 증거이기 때문에 이성에 기초한 자율성 대신 근본적인 의존성을 환기시키며 윤리적 책임감을 토대로 하는 정치공동체를 모색한다. “당신이 없다면 나는 누구인가”, 애도는 “당신을 잃어버렸을 때 당신의 일부 흔적이었던 나도 사라짐을 뜻하기 때문이 아닐까”. 우울증 환자의 나르시스트적 몰입이 다른 이들의 취약성에 대한 고려로 바뀔 수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이해를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으며 다양한 인정규범 확립을 위한 투쟁으로 의미와 구조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미디어는 이제 일상이 된 재앙과 재난의 이미지들로 얼룩지고 애도의 언어들은 진정성이란 단어에 진절머리 난 사람들에 의해 벌써 매도되고 의심받고 있다. 얼마나 많은 비가 내렸고 또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의 자살이 통계로 떠내려갔는가. 작업을 하는 내내 오로지 잡히는 것은 슬픔뿐이었고 이로 인해 열망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정치 공동체였다. 그것은 레비나스가 말한 “모든 고독의 잉여로서의 모든 사회성”이었던가. 불확실함과 파괴가 드러난 곳에서 시작되는 애도에 누구나 인정할 만한 증빙서류를 제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책의 끝 문장 가운데, 문화적 불일치와 번역의 어려움 그것들이 기각되는 대신 이따금 수행하는 “감각적 민주주의”를 고취시킬 수 있다는 믿음에 불을 붙이며 연기를 피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