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바틀비, S.O.S. - Adoptive Dissensus

임민욱




허먼 멜빌의 소설<바틀비>의 주인공 바틀비는 그의 자리에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하기 싫은 일을 상관이 시키면 “I would prefer not to (차라리…하지 않으렵니다)”라고 말한다. 그의 말은 거부의 완곡한 표현에 그치지 않는다. “못 하겠습니다”라는 강한 부정 안에 담긴 의지가, 그의 말에는 없다. 그의 거부는, 거부가 하나의 발언이 되는 것까지를 거부하는 거부이다.

그의 거부는 근본적이다. 억압에 대응하는 순간 이미 결과가 정해져 있는 익숙한 게임의 틀 안으로 들어가 버리게 되는, 노회한 메카니즘의 유혹을 물리침은 물론 그 메카니즘을 무력화시키기까지 한다. 바틀비가 “차라리… 않으렵니다”라는 말을 여러 차례 되풀이하자 상관은 답답해 하다가 분노하다가 마침내 무기력해진다.

멜빌은 바틀비와 주변의 불화가 해결될 가능성을 제시하지 않으며, 이들의 관계를 보편적인 한 모델로 내세우지도 않는다. “차라리… 않으렵니다”라는 긍정과 부정이 동시에 존재하는 말만을 되풀이하는, 비선형적이고 최소한으로 존재하는 인물 바틀비는 불화의 해소 불가능성을 실천하고 만다. 그는 불화를 통해서 존재를 드러낸다.

바틀비 식의 거부가 저항의 한 패러다임으로 얼마나 효과적이냐는 문제와 별도로, 그의 방식은 스스로를 오염시키지 않고 순수한 상태로 보존할 수 있게 해 준다. 순수한 수동성을 통해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서의 존재를 그려낸 허먼 멜빌이 ‘지금 여기’의 바틀비를 불러낸다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모순과 억압이 전 방위적으로 일상 속을 파고드는 현대 사회에서의 저항엔, 그 강도가 다를 뿐 바틀비 식의 거부는 일시적 떨림, 망설임, 헛소리, 중얼거림 속에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설 속에서, 바틀비는 꽉 막힌 벽을 마주보고 꼼짝 않고 서 있지만 지금 여기의 바틀비는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읽으려하고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고 있는 존재들이 아닐까… ‘예’ ‘아니요’라고 확신에 가득 차 대답하기보다는 망설이고 뒤돌아보며 재차 스스로에게 묻는 사람들,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지각하는 존재들, 속도에 제동을 거는 존재들, 파사드에 구멍을 뚫고 넘나드는 존재들… 이른바 성공 이데올로기 또는 대세와는 거리가 먼 소위, 판단력이 느려 실패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그러나 실패한 사람들은 모두 화합하는 사회적 공동체에서 탈락되어야만 할까.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어떤 물질이나 신념으로도 환원되지 않을 수 있는 자신이라는 존재와 대면한 사람들일까.

어느 사회든 형태만 다를 뿐 모순과 억압이 상존한다는 걸 전제한다면, 사람들은 거기서 비롯되는 불화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사회, 제도, 관습, 개인 사이에 종횡으로 얽히는 여러 가지 불화들…그렇다면 거부는 불화를 드러내는, 존재의 운동방식이다. 파업, 수업거부, 병역거부, 단식처럼 거부를 통해 발언하면서 불화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기도 하지만, 전진하면서 전진 속에 후퇴하고, 우회하거나, 구별되지 않는 불확정적인 곳에서 거부하지 않는 거부로 드러나는 불화, 존재 자체로서의 불화가 있다.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싸우기 위해 발언하고 조직하고 연대하면서 공동체 안에 구체적 경계선을 긋는 저항과 달리 이로부터도 누락되는 공동체 밖의 ‘몫이 없는 자들’, 셈해지지 않는 존재들, 일상을 거부한 결정들, 부작위의 순간들, 무위의 공동체는 어디에 있을가..

16년 전 쯤이었을 것이다. 파리에서 나는 바틀비라는 이 인물을 얇은 책 속에서 만났었고 언제부터인가 내가 한번도 제대로 거부하지 못해서 수치심에 갇힐 적마다 들여다 보게 하는 손금과 같았다. 불화를 통해 존재를 인지시키는 멜빌의 방식은 이번 작업에 한 실마리를 제공해줬다. 오른손을 거부하는 왼손잡이의 존재방식, 무관심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관철시키는 10대들의 방식, 정착을 거부하며 떠도는 이들. 사회는 이들을 대상화한 채 자기 편으로, 자기와 같은 이로 만들기 위해 학습시키고 개량시키려고 한다. 바틀비는 그걸 무력화시킨다.

‘S.O.S-Adoptive Dissensus’는 관람객들에게 한계 상황을 던져 놓고 질문한다. 그들은 한강 유람선에 초대된다. 유람한다는 행위, 물 위에 떠 있다는 공간적 특수성은 정서적으로, 신체적으로 해방감과 긴장감을 동시에 유발한다. 사람들은 지금보다는 과거나, 미래를 생각하며 자신과 대면할 것이다.

배는 빛과 속도의 차이를 수용하며 관람객들로 하여금 관객의 입장에서 공유한 기억을 되살려내는 일시적 공동체의 일원이, 더 나아가 어느덧 퍼포먼스의 주체가 되는 주객체 전도의, 뫼비우스의 띠를 경험하게 할 것이다. 거부의 기억들은 불화의 상황과 어떻게 연결될까.

거부의 기억엔, 구체적인 사건들 외에 사소한 거부, 가시화되지 않은 잠재적 거부까지도 포함된다. 거부하지 않았거나 못했던 상황, 발화되지 못한 거부. 나아가 이슈화되지도 못하고 관심 밖으로 밀려난 존재들. 가시화되지 않은 거부는 우리 안의 바틀비를 불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