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소문난 연기
2011
'환' : 책 속의 미술관
워크룸
영화와 미술의 만남
남자 글: 김지운 감독
여자 글: 임민욱

남자:
사랑하는 나의 줄리아.
어디였었지? 기억이 정확하진 않아.
이글루는 따뜻하게 보인다고 했던, 당신의 몹시 춥고 작은 골방에서였나?
얼음의 표면은 온기를 발산하는 털복숭이 같다고 했던…
우리들의 체온만이 차갑고 따스함을 가르던 집, 그 방, 그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건 내가 당신을 줄리아라고 부른 이유야. 우린 릴리언 헬먼을 연기한 제인 폰더 보다 줄리아를 연기한 바네사 레드그레이브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려줬지.
잔다르크는 당신이였어.
우리는 제인폰더가 너무 자신을 의식한다고 생각했지.
자신이 연기한다는걸 의식하고 있다고 생각했어. 물론 훌륭한 연기였지.
그녀의 야심에 찬 디테일은 현대연기에 있어 메릴 스트립이나 흉내 낼 정도야. 하지만 바네사 레드그레이브는 “그 따위 연기술 같은 거 개 한테나 줘버리라고 해!” 그러는 것 같았어.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으르릉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지.
마치 호랑이 같다고 할까? 당신도 알지 내가 누군가를 강한 사람으로 표현할 때 호랑이 같다고 하는 거 ( 난 이 호랑이 같다는 표현을 좋아해 )
아무튼 난 처음으로 남성성을 압도하는 여자, 아니 성을 초월한 여자를 그녀에게서 느꼈던 것 같아. 그녀는 줄리아가 되었지. 그 가공된 세계를 그냥 현실이라고 믿었던 것 같아. 세계를 그렇게 믿어버리니까 엄청난 기운을 뿜어 내더라구. 난 당신이 줄리아 같았어. 아니 줄리아를 연기한 바넷사 레드그레이브 같았지. 아니 이렇게 나누는 건 의미 없어. 바넷사 레드그레이브가 줄리아 였으니까. 난 그녀처럼, 어떠한 상황과 곤경에도 흔들리지 않은 강철같이 단단한 당신을 믿어.

그녀가 되는거야. 내가 줄리아다. 내가 강철이다. 내가 호랑이다.

사실, 이 편지를 보낼까 말까 망설이는 중이야.
내가 당신의 상황을 너무 염려하여 오히려 당신을 약하게 만드는게 아닐까하고말야.
조금만 더 생각해보는게 좋겠어.
하지만 모든게 나의 기우에 지나지 않으리라 생각해.
당신은 나의 줄리아. 나의 바넷사 레드그레이브니까.

여자:
아무래도 내가 더 시간이 많으니까 당신에게서 편지를 받기도 전에 쓰게 되네요.
사실은 약간 무서워서 그랬어요. 오늘도 약 30분간 햇볕을 쬐일 시간이 있었는데 그 때 말한 그 여자가 며칠 사이 부쩍 말라 있는 거예요. 당신도 내 성격 알죠? 내가 말을 건네서 안부를 물어볼까 망설이다, 그냥 포기하고 말았어요...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나를 미쳤다고 할까 봐 말 안하려 했는데 사실 벽 너머 그 소리는 알아 들을 수는 없었지만 확실히 사람들 소리였어요. 꽤 낮고 굵은 목소리로 먼저 말하면 곧 이어 깔깔거리고 박수치며 웃어대는 소리, 이런 종류의 소리는 리듬으로 알 수 있어요. 하지만 어느 나라 말인지도 못 알아 들었어요. 그 리듬을 따라 난 완벽히 그 안에 있었는데 결코 의미를 알 수는 없었어요.
우체부 아저씨가 빨리 당신의 편지를 가져다주면 좋겠네요. 되도록 자세히 써주세요. 무얼 먹고 무슨 일에 화가 났고 누구를 만났는지. 아, 내가 또 쓸데없는 호기심을 갖는다고 핀잔하는 모습이 보이네요. 그 때 기억나요? 내가 잡혀 들어오기 전에 우리의 마지막 대화가 용기에 관한 것이 였던 것을? 빨리 태양이 뜨면 좋겠어요. 당신 소식이 빨리 올 수 있도록. 내 손 보이세요? 천정 가까이 있는 창문을 향해 한 눈을 지그시 감고 내 손을 갖다 대요. 그러고는 엄지와 검지를 구부려 편지를 꺼내듯 하죠. 태양이 빨리 떠오르도록 끄집어내는 시늉 하는 거예요. 싱거운 웃음 짓는 당신이 보이네요. 그럼 또 기다릴게요.

남자:
지난번 편지를 바로 부치지 않다가 이 편지와 동시에 보내려 하고 있어
당신이 혼란스러워 할까 봐 걱정하진 않을게.
우리는 같이 줄리아를 봤었지. 우린 모두 바넷사 레드그레이브의 연기를 좋아했었어.
그녀의 엄청난 사자 같은 기운에 혀를 내둘렀지.
( 난 이 사자 같다는 표현이 마음에 들어.)
그런데 과연 바넷사 레드그레이브가 제인 폰다 보다 연기를 잘하는 사람일까?
바네사가 아니라 제인이 그 역을 맡았으면 어떠했을까? 그러니까 우리가 상찬의 자리에 올려놓아야 할 것은 그녀의 연기, 또는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배역이 아니었을까?
정말로 우리를 강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개성이 아니라 우리 삶에 주어진 배역이었어.
난 당신이 맡은 인생의 배역 때문에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
아마 지금은 그것을 흐릿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러니 당신을 꽁꽁 숨길 것. 당신의 배역을 연기해 볼 것.

여자:
아무래도 말해줘야 할 거 같아요. 내가 미친 게 아니라 그 소리는 분명히 존재했어요.
아이 울음 소리도 있었어요. 그러더니 쉬는 시간 학교 운동장에서 들리는 소리 같은 것으로 바뀌었어요. 그러다 뭔가 쾅쾅 내리치는 소리가 이어져서 법정의 나무망치 소리인가 싶기도 했어요. 아니 미안해요. 사실은 그 모든 소리는 내게 익숙한 소리였어요. 살아 있을 적 지나간 소리…그 중에서 가장 집착한 소리가 있어요. 술잔이 부딪히고 접시가 덜그덕 거리는 소리.
그런데 내 이름이 오가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건 알아 들을 수 있었어요. 내 이름이었으니까. 난 내 이름을 성까지 포함해서 부를 때 대화 내용을 짐작할 수 있죠. 나를 뺀 내가 오가는 대화에 귀는 점점 쫑긋해져 갔어요. 왜 그 여자는 내 얘기를 하는 걸까요? 아니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간수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리 없으니까. 나의 예민하게 길어지는 귀는 벽을 점점 휘게 만들고 있어요. 당신은 지금도 회로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고장 난 부분을 척하니 알아보고 또 고치고 있겠죠? 나의 영원한 미스테리, 어떤 사람들은 내가 알아볼 수 없는 것을 어떤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는 것.

남자:
난 분명히 당신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보내고 말아.
그러니까 이 편지는 앞의 두통의 편지와 함께 당신 곁에 도착할 수도 있겠지.
내가 편지봉투 겉에 숫자를 적어 놓았지만 순서대로 읽는다는 것이 이해를 높이는 것과는 상관 없을거야. 두 번째 편지는 첫 번째 편지를 부정하고 새롭게 정의한 조그마한 나의 자각을 담고 있어. 물론 그 자각은 당신을 향한 것이지.
그리고 세 번째라고 써놓은 이 편지는 일종의 매뉴얼 같은 편지라고 할 수 있어. 순서가 뒤섞이더라도 어느 순간 이 편지를 보게 될 테니까 당신의 혼란을 진정시킬 수 있을꺼야. 누군가는 항상 나를 별거 아닌 것에 혼신을 다하고 있다고 야유하고 조롱할 수 있겠지만 나한테는 그런 디테일의 보정이 중요한 것 같아. 모래알처럼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왠지 나를 꺼림칙하게 만들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하니까..
첫번째 편지는 줄리아의 세계를 현실이라고 믿는, 그녀를 연기한 바넷사 레드그레이브 이야기였어. 가상의 세계도 진짜처럼 믿어버리는 어떤 신기에 가까운 믿음의 힘에 관한 이야기. 두 번째 편지는 일종의 반성과 회의에 대한 내용. 그녀가 진짜라고 믿는 것은 일종의 환상이고 그녀의 개성일 뿐이지 우리가 도달해야 될 보편적 또는 이상적 원리는 아니란 거야. 그래서 난 그녀가 그렇게 강해질 수 있는 이유는 그녀 자체가 아니라 그녀의 세계를 구성하는 배역이었다고 답을 찾았던 것 같아.
상상의 세계, 아직 도래하지 않은 세상을 믿는 힘. 그것은 개성이 아니라 그녀가 그 개성을 발휘할 수 있게 판을 만들어준 그녀 인생의 배역 이였어.
그래서 난 당신에게 보냈던 첫 번째 편지에 써놓았던 내용과 함께 당신의 애칭도 수정해야겠다고 생각했지. 당신을 어떻게 불러야 될지, 무엇을 할지, 다음 편지에 생각해서 써놓을게.
불러본다는 것은 또 하나의 길을 열어주니까.
내 시력이 점점 약해져서일까 당신이 듣는 것에 휩싸여 있듯이 나는 불러내는 힘에 집중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돌아보지 않는 것 같아. 보이는 게 흐릿해지니까 내 생각이나 행동까지 자신이 없어지는 군…결국 난 상상의 힘을 믿는다는 말을 배반할지도 몰라...
그게 편지를 바로 부치지 못한 이유와 상관 있는걸까.

여자:
편지 고마웠어요. 역시 나의 주술이 통한 것 같아요. 당신의 편지에서 한 숨 한 결을 끄집어 낼 수 있었어요. 독방은 금새 버들나무를 마주하고 독주를 마신 당신의 냄새로 따듯하게 데워졌어요. 당신의 편지를 꼭 쥐고 있어요. 벽 너머 소리에 쫑긋했던 귀는 처지고 가슴은 부풀어 오르기 시작해서 이젠 천정이 봉긋해지고 있어요.
이 곳에서 바라보는 나의 하늘은 줄무늬지만 형광색이 이기면서 쇠창살을 넘실거려요. 못알아 듣지만 그렇다고 없지도 않았던 소리들, 그로인해 내 손톱은 반으로 줄었어요.
그 수많은 소리들 불분명한 소리들 가운데 왜 내 이름은 알아듣고 예민해 졌던 걸까요.
그 여자는 오늘도 운동장에서 망루와 다를 바 없는 눈을 뜬 채 서있었어요.
난 결심을 하고 다가가 단도직입적으로 그 소리에 대해 따져 물어보려 했어요. 그런데 내가 뭐라고 말을 건 줄 아세요? 어이없게도 아담과 이브의 성을 물어 봤어요. 흙 아담 물 이브? 뭐 그런 얘기를 농담반 하다가 태초의 사람들이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관계를 맺는 모습을 떠올렸어요. 얼마나 시적이고 사적인 행위인가, 난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어요. 당신은 이해 못할거예요. 더운 여름날 전단을 배에 둘러 숨기고 있다가 종이날에 베여서 피가 흐를 때에도 아파하지 않았던 나잖아요. 이 얘기를 하니까 당신이 더욱 그립네요. 당신이 그때 했던 그 말이 생각나서. 날카로운 칼에 베이는 것 보다 종이에 베였을때 가장 아프다고… 우리가 살던 곳, 하고 싶은 말은 못하고 해서도 안되는 곳. 내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무슨 역할이었는지 묻고 있어요. 세상의 모든 이름은 큰 틀을 못벗어 나는거 같아요.
아픈 귀를 조금 쉬게 하는 대신 부푼 천정을 끌어 안고 잠을 청해 봐요.
이 편지 속에 묻어난 지문 골짜기 사이로 배를 띄우며.

남자:
당신이 보낸 편지를 어렵게, 어렵게 읽어내려 갔어.
내 시력은 점점 약해져서 이제 코 앞에서 꺼내든 당신의 편지조차 읽기 힘들어져가고 있어. 단정하고 반듯하다고 칭찬했던 당신의 작은 글씨체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 대면서 당신 이름을 불러봐…,당신은 세상의 모든 이름은 큰 틀을 못 벗어난다고 하지만 난 이 세상에서 그 누군가에게 이름을 붙이고 불러보는 행위가 얼마나 아름다운 행위인지 당신에게 말해주고 싶어. 내 신체의 기관을 통해 불러내는 비밀스런 나만의 주술행위..
내가 당신을 처음 보았을때도 내가 더듬거리며 당신을 불렀고 길을 물었던 것 같아.
하늘에서 번개는 천둥에 앞서 오고 우리는 이름을 알아듣기 전, 부르는 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릴 따름이지..
당신은 봄날에나 어울릴법한 노란색 상의를 입었던것 같아.
아닌가. 내 눈이 멀쩡한 적이 있었다는 건 두 눈이 희미해져서야 알게 되는군…
당신을 보았던 첫 인상이 자꾸 떠오르는 건 무얼까?
당신이 입고 있던 마지막 옷은 무슨 색이였지?
함께 보았던 것은 서로 믿었는데 이제 함께 못 보는 것은 왜 믿고 싶지 않은 걸까.
이제는 당신이 날 불러 줄 차례야.
두 눈은 흐려지고 배역만 살아 남는 이 곳에서 나의 불치병은 죽음만을 신뢰한다는 것.,
갑자기 당신의 마지막 옷 색깔이 궁금하군…
이것이 내게 남은 마지막 사치야.

나의 루.

여자:
무슨 이유인지는 묻지 마세요. 오늘 이 답장은 단순한 확인일 뿐이예요.
연기처럼 밀려난 믿음. 편치 않은 모래 한 알.
내가 믿었던 정의와 국가는 오늘도 다시 헛탕치고 돌아왔네요..
불평등은 부모님 같은 건가요?... 내가 믿음이 약해진 거 아니냐구요?
아니요, 아직도 나는 이 감옥에 들어오기 전 두 눈 똑바로 뜨고 보았던 그들의 고통과 분노를 내 흩어지는 뼛 속에 흐르게 하고 있어요. 내 몸은 그들 슬픔의 전이체, 복수의 동기…
그런데 벽 너머 그 불분명하고 의미 없는 소리들은 나를 충분히 무너뜨릴 기세예요.
이제 여기서 '본다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게 되었어요.
내 귓속의 달팽이가 짓이긴 소리들을 핥아 먹어요. 알아듣고 싶은 마음 뿐 이예요.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데 없는 것.
달팽이는 이제 내 귓속의 진을 다 빨아먹고 코를 타고 입 속으로 들어왔다가 눈도 빨아 먹기 시작했어요. 저 벽 너머 소리는 나를 숨죽이게 하고 고개 돌리게 하고 눈물이 마르지 않도록 하고 있어요. 당신과 함께 하겠다던 결의마저 다 갉아 먹을 거 같아요.
당신이 이런 나의 모습을 본다면 깜짝 놀라실 거예요.
결국 모래알로 흩어지는 내 머리결, 믿음…
뜨겁게 썩어가는 흙내음으로 뒤덮힌 우리의 이글루에서…

당신의 루.

환: 죽음_소문난 연기
남자: 김지운 감독 여자: 임민욱
2011
'환' : 책 속의 미술관 / 워크룸
Phantasmagoria : Death _ The performative
Ed. Workro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