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변이: 임민욱 & 프레데릭 미숑
김장언, 독립큐레이터/미술비평






“당신은 너무 늦게 왔어요, 아니면 너무 이른 거든가. 오려면 모드게 시작하기 전에 오든가, 아예 모든 게 다 끝나고 왔어야 합니다.” 중에서




내가 그들의 집으로 갔을 때 그 집은 두 개의 어떤 것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들의 집은 평범한 다세대 주택의 한 층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직사각형의 복도가 보이고 그곳에 있는 것은 오직 두 개의 다른 문(門)뿐이다. 복도는 매우 좁았으며 길이도 매우 짧았다. 이 복도는 두 개의 문 저편에 있을 각각의 공간을 연결하거나 혹은 분리하는 기능만을 할 뿐이다. 분명 두 개의 문 저편에는 살림집으로 사용되는 주거공간과 작업실로 사용되는 업무공간이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이 복도는 새로운 방문자를 맞이할 때마다 새로운 공간의 의미를 그 방문자들에게 창조하게 하는 하나의 통로로 작용하는지도 모른다.

‘임민욱 & 프레데릭 미숑’은 공동작업을 수행하는 개별 작가들을 명시하기 위한 하나의 기호로 작동되기보다 오히려 독립된 하나의 객관적 실체처럼 여겨진다. 즉, ‘임민욱 & 프레데릭 미숑’은 개별 주체인 임민욱과 프레데릭 미숑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것이 결합될 때는 그 구성원으로만 이루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가공의 또 다른 ‘임민욱 & 프레데릭 미숑’이 된다. 앞서 언급된 복도와 같이 ‘임민욱 & 프레데릭 미숑’은 각각을 연결하는 하나의 통로이기도 하지만 그들을 구별하는 분기점이며 또한 새로운 세계와 연결되는 다른 창(窓)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추측은 막연한 말장난이라기보다 오히려 그들이 지난 2000년에 보여주었던 <주관적 이웃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획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들은 ‘예술가 커플’이라는 용어가 함축하는 사회적 기의들에 대해서 관계 맺으면서도 다른 차이들을 생산해 내고자 한다. 이것은 예술가 커플 혹은 서로 다른 인종으로 구성된 커플에 대한 사회적 호기심의 차원에서 야기하는 관심에 부흥하면서도 그 관심을 배반하고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하나의 실험인 것이다. 기실 <주관적 이웃집>은 공동작업에 대한 다양한 지점을 함축한다. 그것은 공동작업의 내부와 외부 모두에 걸쳐져 있다. 사회적 관계망에서 남편과 아내, 작가와 미술제도(갤러리)와의 관계, 고용자와 피고용자의 관계 등 모두를 함축한다. <주관적 이웃집>은 이러한 관계망에 대한 새로움 실체인 ‘임민욱 & 프레데릭 미숑’의 수사학이며 수사학 창조를 위한 장치의 발명이다. 이러한 문제는 아주 무의미하고 불편해 보이는 새로운 공간의 창출을 고안하는 것으로 가시화되기도 하며 관계가 만들어내는 긴장관계의 진동을 그 공간 내부에 삽입하기도 한다.


프로젝트의 물신화를 버리기
창작행위가 프로젝트화로 변화되어 가면서 예술가는 고전적 의미의 창작자, 혹은 기술자의 의미를 탈각하고 기획자로서 자기의 정체성을 구성해 나가고 있다. 이것은 작업이라는 완성된 실체를 사회내부에서 작동시키기보다 오히려 사회내부에서 예술을 재의미화 하거나 혹은 재조직화하는 하나의 과정을 대입시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아니면 사회 자체를 미학화하려는 시도로 보여진다. 동시대 미술현장에서 이러한 경향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오히려 프로젝트를 기획하지 않는 작가를 찾는 것이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창작활동의 프로젝트화는 분명 개념미술의 영향아래서 이루어진 총체적 움직임의 하나이다. 그러나 동시대 문화현상에서 보게 되는 프로젝트화된 작업들의 많은 경향들은 개념미술이 모더니즘 미술에 대항하며 ‘미술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제기를 일으키고 그 내부에서 미술의 개념을 탈각화하기 위한 모든 행위들 혹은 방법론을 속류화시킨다. 어쩌면 이러한 현상은 개념미술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삶을 이벤트화함으로써 개별주체의 삶을 그 이벤트에 반영하고 그 이벤트로 삶의 존재 조건을 확보하고자 하는 일반 대중과 같이 동시대미술도 미술 자체를 프로젝트화함으로써 미술이 갖고 있는 존재조건을 증명하고자 한다. 프로젝트의 물신화는 프로젝트가 기획되고 사회내부에서 작동되는 과정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프로젝트라는 형식은 개념미술 이루 동시대 미술현장에서 미적 정당성을 부여 받는 최소형식 중 하나로 인정되면서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되는 ‘개념’ 자체를 양식화한다. 더욱이 속류화된 프로젝트는 관객과의 소통에서도 예술체험 자체를 프로젝트 내부의 고안물로 정착시킴으로써 체험행위에 대한 다양한 의미구조의 생산을 무력화시키고 체험행위 자체를 추상화시킨다. 이러한 프로젝트의 물신화는 작가들의 작업뿐 아니라 큐레이터의 전시기획, 심지어 평론가의 입장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최근 광주비엔날레 본전시의 프로젝트는 이러한 물신화의 종합세트였다. 동시대 미술현장에서 목도하게 되는 프로젝트의 물신화의 문제점은 비단 그 프로젝트를 브랜드화시키며 예술창작행위를 문화산업 내부에 유통시키며 예술 자체를 속류화시킨다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 큰 문제점은 그 물신화를 거듭 전유해버리는 이데올로기의 작동원리에 있다. 물론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미술(사회)제도뿐만 아니라 예술행위의 주체들 심지어 매개자들의 외부와 내부 모두에 있다. 이 이데올로기의 잔인성은 모든 프로젝트의 모든 개념을 유연하게 흡수해 버리고 포섭해 버린다는데 있다. 이것은 모든 정치적 함의들을 무력화시키는 극단적 상대주의로 신자유주의가 위장하는 YES 이데올로기의 유연성에 적극적으로 봉사하며 따라서 모든 ‘개념’ 혹은 ‘프로젝트’는 상품화되어 버린다.
지금까지 모든 작업을 프로젝트로 진행했던 ‘임민욱 & 프레데릭 미숑’의 작업은 얼핏 프로젝트 물신화의 총아로 여겨진다. ‘임민욱 & 프레데릭 미숑’의 프로젝트는 그 나름의 시선함으로 미술제도 내부에 유통되어 왔으며 새로운 아이디어의 창출법과 생경한 수사학은 프로젝트의 물신화에 적극 봉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임민욱 & 프레데릭 미숑’은 이 지점에서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어떤 지점이 프로젝트의 물신화에 포섭되지 않으면서 지속적으로 프로젝트를 고안하는 그의 기계적 장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우선 ‘임민욱 & 프레데릭 미숑’은 완결된 장치의 고안에 몰두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프로젝트의 개념과 실천을 강조하거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수사학 작동원리의 최소공배수를 설정하고자 하며, 그 설정자체에 집중한다. ‘임민욱 & 프레데릭 미숑’의 고안물은 선언된 실체 혹은 서술어적 작동원리이고 오픈 소스로서 프로그래밍언어이다. 그 최소공배수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지도 모른다. 우선, 정서적 환기를 야기하는 소재주의적 접근을 거부하며 다른 하나는 사회적 관계망을 재조직하며 재조직 이후의 새로운 장치를 재창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안된 혹은 창조된 장치내부에서 이전의 관계망뿐만 아니라 개념과 작가 그리고 관객 모두를 이중 소외시키는 것이 그것이다.
<우리는 운명과 협상하는가?>는 강경이라는 도시의 의미를 기억하고 그 동시대적 의미를 재현하기 위해 기획된 전시에 출품된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에서 ‘임민욱 & 프레데릭 미숑’은 강경이라는 도시의 특수성을 포섭하면서도 거부하고 그 도시의 역사와 이미지가 연결되는 동시대 사회 문화적 현상들에 접촉한다. 그리고 접촉을 통해 야기되는 다섯 개의 수사학을 창조한다. 다섯 개의 수사학은 얼핏 매우 분열적인 자기고백으로 보여지지만, 이것은 강경이라는 도시의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를 향유할 지역구성원을 주인공으로 하는 하나의 영상소설이다. 이 소설은 강경이라는 특수한 공간의 구성원들만이 갖고 있는 갈등과 욕망을 지칭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도시든 농촌이든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어떠한 형식의 공동체 공간에 거주하는 우리의 갈등과 욕망을 은유적으로 암시한다. 더욱이 이 소설에서는 ‘정지표지판’과 같은 아무도 믿지 않지만 당위적으로 명시해야 하는 사회의 상투적 표현양식을 등장시키면서 전지구적으로 문제화되고 있는 문화의 획일화를 언급한다. 즉 제도가 정비되고 표준화가 이루어졌던 근대 이후 당연시되는 미시적 사회 문화적 현상에 대해서 문제화 시키고 자신만의 독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또한 이 프로젝트는 지식인 혹은 문화인이 갖고 있는 상투적 불평과 불만들에 대해서고 간과하지 않는다. 소위 지식인들이 갖고 있는 나르시즘적 불평과 불만 ? 이 영상소설에서는 도시개발과 발전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으로 나타난다 ?에 대해서도 상투적인 히스테리적 발작으로 명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낸 공동체 혹은 공간 속으로 회귀할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운명에 대해서 그 운명을 협상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질문한다. 이러한 문법구조는 <스틸 갤러리의 별관 이야기>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한 철강회사에서 운영하는 미술관에 초대된 ‘임민욱 & 프레데릭 미숑’은 자신을 초대한 전시의 상황을 철저히 전유한다. 이 프로젝트의 전유방식은 기획자의 의도에 적극 부응하면서도 그의 의도를 배반하고 또한 기획자와 협상된 ‘변형 프로젝트’가 회사에 의해서 다시 거부될 때 그 의도를 수응하면서도 회사의 의도를 배반하는 것을 보여준다. 종국에는 프로젝트가 제도 내부와 외부 모두에 소외되었음을 인정함과 동시에 제도자체가 이 프로젝트에 의해서 소외되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 프로젝트는 하나의 아름다운 동화로 기획되었는데 그 동화의 여주인공은 사회와 제도에 대해서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또한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미를 가졌다. 그녀는 미술관이 조명을 필요로 하는 한밤중에는 어둡지만 막상 대낮에는 환하게 조명을 밝히는 모순적인 장소임을 직시한다. 그러나 그녀는 (미술)제도와의 협상 테이블에서는 해독 불가능한 자폐적 서술어 혹은 독백으로 제도를 설득하고자 한다. 제도에 대한 설득이 실패할 것이라는 것을 직시했을 때 소녀는 제도의 희생양이 되기로 결정하고 스스로 운명을 마무리한다. 소녀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 소녀의 자폐적 서술어 혹은 독백이 상징하는 바이다. 이 상징언어는 이미 협상을 포기한 상태에서 자신의 개념을 포기하지 않기 위한 고도의 수사학이며 또한 제도내부에서 무력한 자신의 위치를 포장하는 하나의 장식품이다.
종국에는 희생양이 된 소녀 앞에서 작가는 그 소녀가 제도에 의해서 희생된 것인지 아니면 제도에 의해서 희생되어 준 것인지에 대해서 질문한다.


상황에 대한 진실은 없다
이러한 ‘임민욱 & 프레데릭 미숑’의 수사학이 가능한 것은 상황에 대한 거짓과 진실이라는 이분법적 해석에 의해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상황의 내부와 외부 그리고 개별주체의 내부와 외부에서 우리가 대면하는 그 상황의 조건들을 인식하고 작동시키는 방식의 문제이다. 상황에 대해서 진실은 없다는 것은 모든 것이 거짓이니 누구나 무엇을 저질러 버려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또한 사회의 미학화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추종을 의미하는 것 역시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상황에 대해서 개별주체가 어떤 장치를 고안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임민욱 & 프레데릭 미숑’의 수사학 혹은 장치는 진실을 진실로 증명하고자 하거나 실천적 운동의 형식을 대안을 제시하고자 하지 않는다. 더욱이 그 장치는 사회를 심미화시키지도 않는다. 그것은 동시대 미술현장에서 프로젝트화된 적업의 물신화를 거부하고 사회내부에서 예술가 스스로가 물신의 상징물로서 유통되길 거부하는 하나의 생존방식이다. 이것은 어쩌면 예술가가 그의 프로젝트로서 작업에 대한 미학적 가치를 거부하고 오히려 전술의 생산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하나의 시도로 읽혀진다. 이러한 시도는 확장되고 유연화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체제 내부에서 예술가의 새로운 생존조건을 탐색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도 읽혀진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임민욱 & 프레데릭 미숑’이 자신의 관심분야를 미학에서 윤리학으로 이동시키면서 우리가 처한 상황을 미학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에 윤리학적 물음을 던지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지도 모른다. 동시대 미술현장의 변화화 위기 속에서 ‘임민욱 & 프레데릭 미숑’의 실험이 어떤 결과물을 가져오게 될지 자뭇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