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렇기에 가능하다: 임민욱론

이택광
경희대 교수, 문화비평가

1. 말할 수 있는 것의 증언

임민욱은 보이지 않는 것에 관심이 있다. 그러나 그가 보이는 것을 부정하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복권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반(反) 재현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을 ‘증언’하고자 한다. 이 방식은 상당히 흥미롭다. 이미지의 배치를 넘어서서 그가 원하는 것은 말할 수 있는 것(sayability)을 구성하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관심이야말로 임민욱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이다.
이런 까닭에 임민욱에게 중요한 것은 ‘말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말들’로 이루어져 있다. 때로 이야기이기도 하고, 때로 알아들을 수 없는 웅얼거림이기도 하고, 때로 귀를 아프게 만드는 소음이기도 하다. 이처럼 그에게 ‘말들’은 언제나 소리이다.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임민욱은 이렇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제하는 것들을 존재하게 만들려고 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지오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 1942-)의 정의에 따르자면,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물 자체(the thing itself)이다. 아감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물 그 자체는 하나의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말할 수 있는 것이고, 언어에서 문제가 되는 것을 향해 열려 있는 것이고, 언어에서 우리가 지속적으로 전제하거나 잊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사물 그 자체라는 것이 친밀성 내에서 일어나는 잊어버림(forgetfulness)과 자기 버림(self-abandonment)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감벤의 진술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말할 수 있는 것”과 “열려 있는 것”, 그리고 “잊어버림”과 “자기 버림”이 동격이라는 것이다. 사물은 처음에 언어의 대상이지만, 말하는 순간 언어로부터 배제되어버린다. 언어는 미리 전제된 전통일 뿐이다. 이 언어의 체계, 또는 담론은 사물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런 까닭에 사물 그 자체는 잊히고 버림받는다. 임민욱의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이런 언어의 소외 자체이다. 말하기는 이렇게 배제된 사물 그 자체의 존재를 환기시킨다.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러므로 존재의 최소단위이다. 말할 수 있다면 보이지 않더라도 사물의 존재는 ‘증언’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증언’을 수집하는 것이 임민욱의 작업에서 핵심을 이룬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이 말하듯이, 사물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소리 없는 것에 소리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 없는 것을 이름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벤야민이 말한 번역처럼, 인간의 언어가 배제한 사물들을 다시 언어로 복귀시키는 것이야말로 임민욱의 작업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의미심장한 철학적 동기이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전례를 따라서 벤야민은 예술작품을 폐허로 규정한다. 벤야민에게 텍스트는 사라져서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했던 원-텍스트(Ur-text)를 ‘증언’하는 폐허 같은 것이다. 이런 까닭에 폐허의 텍스트는 곧 ‘증언’이라고 할 수 있다.
사물 그 자체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언어를 떠나서 어떤 것도 소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통을 이야기하더라도 그 방식은 결국 언어 내에서 가능하다. 이로 인해서 사물 그 자체에 대한 오해가 발생한다. 말할 수 없는 것을 언어로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필연적인 오해가 있다. 그렇게 말해진 것에 말해지지 않은 것이 포함되어 있는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언어라는 연약한 형식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것이 소통에 대한 임민욱의 관점을 만들어낸다.

2. 이야기라는 대상 없는 주체화

소통에 대한 의심은 그래서 임민욱에게 중요한 문제이다. 연약한 언어의 형식에 대한 임민욱의 통찰은 <스무고개-‘장마 도깨비 여울 건너가는 소리’ Game of 20 Questions-‘The Sound of Monsoon Goblin Crossing a Shallow Stream, 2008>(삽도 1)(이하 <스무고개>)과 (도 9)(이하 )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자기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고, ‘No’라고 말할 수 없는 문제가 두 작품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스무고개>에서 말은 소음으로 부서져서 반복적 리듬으로 바뀐다. 분할된 화면은 같은 공간이지만, 다른 차원에 놓여 있는 말들을 보여준다.
‘다문화’라는 기표는 여기에서 구체적 인격성을 획득한다. 등장인물들이 기표이다. 이 기표들은 말해진 것들이지만,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포함한다. 그래서 <스무고개>는 게임처럼 말할 수 있는 것을 찾고자 한다. 언어로부터 배제된 주체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 바로 <잘못된 질문 Wrong Questions, 2006>(도 5)이다. 이 작품에서 독백을 늘어놓고 있는 택시기사는 자신의 말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 택시기사의 말들은 주어진 것들이다. 내용도 자신에 대한 것이 아니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것이다. 국가가 부여한 말들이 결정적으로 택시기사를 배제하고 소외시키고 있는 장면이 여기에서 ‘증언’되고 있다.
주차할 공간, 다시 말해서 머물 공간을 찾아 떠도는 주체는 자신의 장소를 주장하고 싶은 ‘시민’이다. 이 ‘시민’을 호명하고 있는 것이 바로 택시기사의 입을 통해 ‘증언’되고 있는 이데올로기(ideology)인 것이다. 그러나 이 ‘시민’에게 거주할 수 있는 구체적 장소는 없다. 택시는 움직이고, 그의 장소는 국가라는 추상적 공간으로 확대된다. 이데올로기가 말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작품이 바로 <잘못된 질문>이다.
임민욱은 이데올로기를 제거할 수 있다기보다, 그것이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알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는 탈이데올로기를 주장하기보다, 그 이데올로기 내에서 이야기하기를 선택한다.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야기꾼이다. 왜 이야기이고 이야기꾼인가? 이야기하기에 대해 임민욱은 벤야민과 유사한 입장을 견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랜 시간 동안 예술작품의 환경 -농촌, 어촌, 그리고 도시- 에서 성공적이었던 이야기하기는 그 자체로. 늘 그러해야 하듯이, 의사소통의 예술적 형식이다. 이 행위는 정보나 보고서처럼 ‘본질적으로’ 순수한 사물이나 사물의 요체를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이야기하기는 그에게서 다시 사물을 끄집어내도록 하기 위해 이야기꾼의 삶 속으로 그것을 가라앉힌다. 따라서 이야기꾼의 흔적들은 진흙 도기에 찍힌 도공의 지문처럼 이야기에 찍힌다”.

진흙 도기에 찍힌 도공의 지문 같은 이야기꾼의 흔적들을 임민욱은 추적한다. <잘못된 질문>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임민욱이 제시하는 것이 바로 <불의 절벽2_서울 FireCliff 2_Seoul, 2011>(도 12)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이야기꾼은 고문과 관련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로 풀어낸다. 경험을 무대화하는 것, 이 상황이야말로 이야기의 원리일 것이다. <불의 절벽2_서울>은 단순하게 고문 사실을 고발하거나 보고하지 않는다. 피해자를 무대에 초대함으로써 이야기꾼으로 만들어낸다. 물론 이런 특징은 <불의 절벽1_마드리드 FireCliff 1_Madrid, 2010>(도 11)에서도 드러난다. 마드리드의 공장에서 일했던 경험들은 이야기와 노래로 바뀌어서 ‘전달’된다. ‘의사소통의 예술적 형식’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이 극대화된 것이 <국제호출주파수 International Calling Frequency, 2011>(도 13)이다. 앞서 논의했듯이, 임민욱은 이 작품에서 언어라는 전통의 형식 자체를 아예 배제해버린다. 물론 배제한다고 해서 언어가 사라질 수는 없다. 그러나 특정한 언어를 지정하지 않음으로써 임민욱은 ‘정체성’에 사로잡힌 개인을 풀어놓고자 한다. 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이들은 개인이지만 동시에 ‘국제호출주파수’를 수신하고 있는 네트워크이다. 이 작품에서 임민욱의 이야기는 시에 다다른다. 물론 이 시는 일반적인 서정시의 감각을 공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시는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1937-)가 말하는 ‘사건의 탐구’에 가깝다.
시는 진리생산을 증언하고, 텍스트화를 통해 그 진리를 고정시킨다. 이를 통해서 탄생한 시적인 주체야말로 존재론을 구성하는 진리의 주체인 것이다. 바디우에게 진리는 심연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이 존재의 심연은 그 무엇도 아닌 무(nothingness)이다. 무는 존재하지 않는 원인이고, 결국 이런 부재원인(absent cause)의 흔적이 곧 시이다. 따라서 시는 언제나 선행하는 부재원인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주체가 있기 전에 발생했던 사건을 드러내는 것이 시의 텍스트인 셈이다. 부재원인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건의 역설을 구성한다. 바디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건적 장소의 역설은 오직 사건이 현신하는 그 상황에서 현신하지 않는 것을 근거로 인지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확실히 사건은 오직 다자가 하나로 수렴되는, 그래서 그 상태의 보증에서 감산된 그 상황에 존재하지 않는 다자들로부터 형성된 일자에서 기인할 뿐이다”.

이 사건의 역설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실재∙진리라는 핵이다. 마치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이 정의하는 판타지처럼, 사건의 역설은 진리를 향한 유혹이면서 동시에 그 진리와 거리를 유지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바디우에게 진리와 주체의 관계는 무한성의 공리(the axiom of infinity)를 통해 구성된다. 이렇게 실재의 핵은 비어 있다. 이렇게 비어있는 핵을 공백(void)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바디우의 방식이다. 공백은 무엇인가? 바디우에 따르면, 국면으로 자리를 잡은 사건에서 제외된 것이 공백이다. 쉽게 말하자면, 사건은 상황(situation)과 상태(state)로 구분할 수 있는데, 상황이 고착화된 것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상황에서 공백을 뺀 것이 상태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사건은 언제나 폐허(ruin)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3. 폐허의 만보자

임민욱의 작품에 등장하는 폐허들은 이처럼 사건의 흔적들이다. 임민욱이 보여주려는 것은 지금은 상태로 남아버린 사건의 상황이다. <뉴 타운 고스트 New Town Ghost, 2005>(도 4)에서 분노의 감각으로 쏟아져 나왔던 정념이 (도 8)에 오면 새로운 차원을 획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키퍼’를 들고 재개발 현장을 누비는 남자는 누구인가? 이 남자는 도시를 어슬렁거리면서 주유하던 만보자의 패러디처럼 보인다. 만보자는 무엇인가?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1821-1867)는 콩스탕틴느 기(Constantine Guys, 1802-1892)라는 화가를 만보자로 규정하면서, ‘근대성’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어떤 자질을 체현하고 있는 예술가라고 말하는데, 이 만보자의 형상과 에 등장하는 남자를 겹쳐볼 수 있을 것이다. 보들레르는 만보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마치 공기가 새에게, 물이 물고기에게 그러하듯, 군중은 그를 구성하는 요소이다. 그의 열정과 직업의식은 군중의 살을 이룬다. 이 완벽한 만보자에게, 이 열정에 넘치는 구경꾼에게, 군중의 심장에, 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밀물과 썰물에, 이 탈주와 무한의 한 가운데에 거처를 마련한다는 것은 무한한 환희이다”.

보들레르는 근대예술, 다시 말해서 근대적 시인의 특징으로 ‘도시의 거리를 한가하게 거니는 만보’를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만보’는 건강이나 기분 전환을 위해 의도적이고 의식적으로 행하는 ‘산책’과 구분해야 하는 ‘목적지 없는 걷기’이다. 만보는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걷는 것을 우아하다고 여겼던 19세기 파리의 문화를 드러낸다. 보들레르의 만보자에게 만보는 존재의 조건으로 ‘군중’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다. 만보자는 아스팔트 위에서 식물채집을 하는 이다.
보들레르가 묘파한 것처럼, 19세기 파리에 만보자를 출현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벤야민은 만보자의 한가한 눈길과 발길을 붙잡은 것으로서 ‘상품의 신전’ 파사주(passage)를 지목한다. 파사주는 만보자의 ‘여가를 위한 걷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이렇게 파사주를 어슬렁거리면서 구경하던 만보자를 시인의 지위로 격상시킨 사람이 보들레르인 셈이다.
만보자를 근대의 시인, 다시 말해서 근대 예술가의 존재방식이라고 규정했던 보들레르의 말에서 어떤 진실을 읽어낼 수 있을까? 만보자야말로 근대에 직면해서 변화한 예술가의 존재방식을 보여주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벤야민에게 만보자는 ‘시인’이라기보다 ‘수집가(collector)’에 가까운 존재다. 이런 사실이 벤야민과 보들레르를 구분하는 차이를 드러낸다. 벤야민에게 거리는 ‘수집을 위해 거주하는 장소’이다. 여기에서 벤야민의 만보자는 보들레르와 달리,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수집해서 지식을 생산한다.

“만보자가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느끼는 회상적 도취는 그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감각적 데이터에 모습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종종 추상적 지식 자체 -실제로 죽은 사실들- 를 무엇인가 경험할 수 있고 살아 있는 것으로 소유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지식이 한 사람으로부터 다른 사람에게로, 특별히 구전을 통해 전승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게 만든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만보자는 근대의 시인으로서 새로운 앎의 생산자이다. 그러나 이런 만보자는 자본주의의 노동 분업 체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다. 만보자는 노동자라기보다 예술가이다. 생산자이긴 하지만, 자본주의의 체계를 벗어나고자 한다. 따라서 이 생산자는 그 체계에서 탈주한, ‘꿈꾸는 게으름뱅이’이다. 그렇다면 이런 만보자가 만들어내는 앎은 무엇일까? 그 앎은 ‘번개처럼 오는 것’이고 ‘텍스트는 번개로 짜인 긴 두루마리’이다. 이런 앎을 만들어내는 힘은 논리적인 추론이나 합리적인 언설이 아니라 바로 충격(shock)이고, 파국의 체험(Erlebnis)이다. 한 마디로 연약한 언어의 형식을 드러내는 과정인 것이다. 텍스트라는 두루마리를 짜는 번개가 바로 시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에서 우리는 어떤 사건도 발견할 수가 없다. 사건은 이미 일어났든지, 아니면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재개발 현장을 돌아다니는 어떤 남자이다. 이 남자는 유유자적하게 보이지만, 만보자와 달리 ‘구경’할 파사주가 없다. 이미 건물은 사라졌고, 이 남자는 홀로 거닐 뿐이다. 이런 측면에서 는 보들레르의 만보자에 대한 패러디이다. 근대성의 수혜자였던 만보자는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자행되는 재개발로 인해 폐허를 거니는 운명을 맞는다.
폐허의 풍경은 만보자에게 허무주의를 강요한다. 그러나 재개발 현장을 돌아다니는 남자의 손에 들린 ‘키퍼’는 근대의 허무주의에 대항하는 도구이다. 말 그대로 손에 들고 다니는 ‘키퍼’는 무엇을 지키기 위한 목적이다. 도대체 이 남자는 무엇을 지키고자 하는가? 이 지점에서 임민욱은 ‘사라진 것’에 대한 전혀 다른 태도를 드러낸다. 그는 사라진 것을 기록하는 작가라기보다, 사라지고 있는 것들을 지키는 작가이다. 작품에 담아 놓은 모든 장면들이 그가 지키는 것, 다시 말해서 언어로 복귀시키는 사물이다. <롤링 스톡 Rolling Stock, 2003>(도 2)이야말로 이를 명확하게 증명해준다. 빠르게 전환되는 장면과 음악의 리듬은 정확히 일치하면서, 사라지고 있는 것들을 붙잡는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런 반복은 계속될 것이고, 노래도 계속 돌고 돌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노래의 리듬과 멜로디는 사물의 임시거처인 셈이다.

4. 불가능해야 가능해지는 것

사건의 폐허성은 전체의 구성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마치 이것은 라캉의 이론에서 확인할 수 있는 상징계와 실재계의 관계를 지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재계는 상징계와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지만, 결코 완전한 상징계의 일원으로 포섭되지 않는다. 실재계야말로 무의식의 영역인 것인데, 라캉의 개념에서 본다면, 무의식은 성(sexuality)이라는 “특권적 트라우마의 장소”를 보완하기 위해 타자로부터 주체가 빌려온 이미지와 언어의 총체이다. 무의식은 개인의 고유성을 구성한다. 주체는 바로 이 고유성의 위치를 의미한다.
<국제호출주파수>는 이런 주체의 고유성을 집단화하기 위한 중요한 프로젝트이다. 이 작업에서 필수적인 것이 바로 주체의 충실성이다. ‘국제호출주파수’에 자신을 실어내고자 하는 관심과 열망이 필요하다. 바디우는 주체의 충실성이라는 범주를 말라르메(Stephane Mallarmé, 1842-1898)의 시 「주사위 던지기는 결코 우연을 배제하지 않을 것이다 Un coup de dès jamais n’abolira le hasard」를 분석하면서 추출해낸다. 바디우는 “‘한 번의 주사위 던지기는 결코 기회를 폐기하지 않는다’는 시구에 근거해서 본다면, 허무주의, 행동의 소용없음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가 없다”고 말하는데, 여기에서 허무주의는 ‘리얼리티에 대한 숭배’와 이에 대한 ‘허구적 관계’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말하자면, 허무주의는 대상을 가진 주체, 그 대상의 달성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자포자기인 것이다. 실재의 재현에 대한 집착은 결국 허무주의를 낳을 수밖에 없고, 반대로 이를 외면하는 것도 존재의 심연에 드리운 상상적 유사 이미지의 유희에 사로잡히는 길이다.
바디우가 말라르메의 시에서 허무주의와 다른 행동을 보았듯이, 임민욱도 <국제호출주파수>에서 상상의 행동을 조직한다. 이 행동이야말로 시, 또는 예술이라는 진리생산절차의 특징이다. 예술은 실재의 흔적에 선행하는 토대에 근거해서 세계를 재구성한다. 이 재구성은 필수적으로 기존 세계에 대한 비판을 내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예술은 단순한 테크네(techne)에 그치지 않는다. 테크네에 머문 예술은 쉽게 허무주의에 승복한다. 예술이 허무주의를 이길 수 있는 길은 규범적 조건을 재구성함으로써 가능하다.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ére, 1940-)식으로 말한다면, 감각적인 것의 나눔(the distribution of the sensible)을 재배치하는 것이다. 공동체가 위계적인 질서로 구획 지어 놓은 감각적인 것들을 미학적 차원으로 개방해서 새롭게 나누는 것이야말로 바디우가 염두에 두는 말라르메적인 시학의 미덕이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재구성’이라는 행동이다. 이 행동은 해체와 폐기, 그리고 긍정이라는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바디우가 허무주의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는다고 말한 예술적 행동의 의미는,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해체하는 수준에 머무는 반미학적인 퍼포먼스가 아니라, 미학적인 전제 위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것의 생산이다. 도대체 이 새로운 것의 생산은 무엇일까? 그것은 모든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무화시키는 미학적 차원이자 동시에 사건의 흔적을 만드는 선행적 토대, 곧 상황이다. 이 상황의 소멸 이후에 폐허로 남은 사건의 잔해를 텍스트로 고정시킨 것이 예술인 것이다.

임민욱의 예술은 이 상황의 현실에서 발견하고자 한다. 소멸되어서 폐허만 남은 상황을 다시 불러내는 것이 그의 미덕이다. <손의 무게 The Weight of Hands, 2010>(도 10)에서 임민욱이 시도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열 감지 카메라를 통해 드러난 장면들은 ‘손’이라는 진화의 산물이자 동시에 원초적인 노동의 수단을 ‘온도’에 맞춰 보여준다. 색채들이 말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손의 무게’이다. 겉으로 보면 보이지 않는 무게가 ‘온도’를 통해 보인다. 감각의 전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부정에서 긍정으로 넘어가는 이동이 여기에서 필수적이다. 이런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 행동이라고 임민욱은 암시한다. 이 행동은 사건의 진리에 대한 주체의 충실성을 의미한다. 사건의 흔적을 가능하게 만든 진리에 대한 집요한 추구야말로 바디우가 말하는 시의 정신이다. 이 진리는 사건을 발생시킨 부재원인의 지점들이다. 이것을 밝혀내는 것이 곧 시의 임무라고 바디우는 생각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완성된 텍스트는 성립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시가 재현하려는 것은 이미 상태에서 감산되어버린 상황의 공백이기 때문이다. 이 공백은 결코 텍스트로 재현할 수가 없다. 임민욱이 열 감지 카메라를 통해 보여주는 텍스트는 재현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런 방식으로 임민욱은 폐허를 탐사하고 진리의 지점들을 위상화해서 제시하고자 한다. 마치 상징계가 그렇듯이, 그의 작품은 성립불가능성을 통해 작품으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숱한 기호와 상징으로 가득한 지도와 같은 것이 바디우가 생각하는 시라면, 위상화된 색채와 소리가 등고선을 그리고 있는 지도가 임민욱이 생각하는 예술이다.

이렇게 보면, 임민욱의 작품들은 주관주의를 부추기는 것처럼 보인다. 대상보다 주체의 행동이 선행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객관적인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주관적 투사를 집적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이런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국제호출주파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조직이나 매개도 거부하는 이런 방식의 퍼포먼스가 오히려 허무주의를 더 부추길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임민욱의 작품에서 주체는 언제나 ‘저곳에’ 있는 객관적 물질조건과 연동한다. 주체가 아무리 대상을 만들고 진리를 주장하더라도, 그 행동을 이해시킬 수 있는 전제조건들이 있어야 한다. 임민욱의 작품은 이 조건들을 언제나 전제해놓고 있다. 재개발이나 점거농성현장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임민욱의 작품은 항상 구체적인 장소성을 갖는다. 물론 이 장소성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흐르는 특징을 가진다. 그가 관심을 보이는 것은 흐르는 장소성, 이동의 공간이다. 주체가 사물과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면 인식의 프레임 같은 것이 필요하다. 이것을 바디우는 테크네의 법칙이라고 본다. 이 테크네의 기능은 상당히 실증적인데, 이를테면, 이미지와 물질적 대상을 일치시키는 방식을 테크네라고 일컫는 것이다. 이 테크네를 통해 예술에 대한 규범적인 보편성이 만들어진다. 임민욱의 작품은 이런 테크네의 법칙을 주체의 충실성과 같이 결합시킨다. 그렇다고 임민욱이 테크네의 법칙을 엄밀하게 따르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임민욱은 집요하게 테크네의 법칙을 뒤흔드는 방식으로 진리의 흔적을 텍스트에 담아내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테크네의 법칙이 탄생하고 주체는 다자이면서 일자로 ‘존재’하게 된다. <국제호출주파수>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과정이다.
<국제호출주파수>에 가담하는 순간, 이 존재는 기존에 있던 그 주체가 아니다. 그 자체가 퍼포먼스가 되는 것이다. 이 퍼포먼스는 사건을 모방한다. 존재의 조건을 흔들고 새로운 주체를 만들어내는 사건 말이다. 임민욱의 예술은 이렇게 새로운 주체를 가능하게 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 가능성은 아이러니하게 예술의 불가능성이라는 조건 위에 놓여 있다고 하겠다. 현실은 예술의 가능성을 무너뜨린다. 임민욱은 이것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작가이다.

예술은 불가능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추구는 가능하다는 역설이 여기에 있다. 이런 까닭에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물 그 자체를 향해 열려 있는 상태인 것이다. 이 상태 자체를 개선할 수는 없다. 다만 이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추구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사물을 언어로 복귀시키기 위해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말하자면, 임민욱의 프로젝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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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gamben, Giorgio, “The Thing Itself”, Substance 53 (1987), p. 25
2. Benjamin, Walter, Reflections, Peter Demetz (trans.), (New York: Schocken, 1986), p. 325
3.Benjamin, Walter, “The Storyteller”, Selected Writings Volume 3: 1935-1938, Edmund Jephcott, Howard Eiland, et. al. (trans.), (Cambridge MA: Harvard UP, 2002), p. 149
4. Badiou, Alain, Being and Event, Oliver Feltham, (trans.), (London: Continuum, 2007), p. 192
5. Baudelaire, Charles, The Painter of Modern Life and Other Essays, Jonathan Mayne, (trans.),
(London: Phaidon, 1995), p. 9
6. Benjamin, Walter, The Arcades Project, Howard Eiland and Kevin McLaughlin, (trans.), (London: Belknap, 1999), p. 417
7.맹정현, 『리비돌로지』(문학과지성사, 2009), p. 7
8. Badiou, Alain, Being and Event, p. 1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