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늦은 혹은 너무 이른, 미술
이영욱, 미술이론





지난 10여 년간의 임민욱(그리고 그녀의 공동작업자)의 작업은 오늘날 이곳에서 미술행위라는 것이 어떻게 유의미하게 존립할 수 있는 가와 관련한 탐색과 자문 그리고 실험으로 이해될 수 있을 듯하다. 설치, 비디오, 퍼포먼스, 출판, 교육 등 그야말로 전방위적 양상을 보이는 작업들 대부분은 관례적 미술 범주를 넘어서서 미술의 개념과 제도 관행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들이었다. 특히 그것들은, 창조성을 사적 주관의 특성이 아니라 집합적이고 집단적인 대화 구조의 산물 이해하려는, 강한 공공적 지향을 보여주기도 했다.
예를 들어 영구적인 오브제와는 무관한 일시적이며 잠정적인 설치 작업들, 집단창작 내지 공동작업의 선택, 미술관과 전시의 관행들을 철저히 심문하고 심지어 조롱하는 작업들, 전문가적인 엘리트주의를 거부하고 아예 미술관 밖에서 퍼포먼스를 벌리거나, 그냥 놀기도 하고, 미술적인 수단을 활용한 사회교육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등의 작업 등이 그렇다. 공동체의 사회적 기억을 심문하고 망각된 현실을 상기시키려는 일련의 비디오 작업 역시 이러한 문맥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이 작업들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일은 그리 쉬워 보이지 않는다. 작업들이 그야말로 변화무쌍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과는 별도로 이 작업들이 이곳의 미술사에 또 하나의 새로움을 추가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 나름대로 미리 떠올려 보는 질문과 잣대들은 이렇다. 그녀의 작업 전략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지금 이곳의 미술과 사회적 문맥을 관통하는 적합성을 얻어냈는가? 그리하여 나름의 유의미한 작동력을 획득해냈는가? 등. 답변은 쉽지 않을 듯하다. 일단 더불어 음미해 볼 밖에.

관객은 구경꾼?
1998년 그녀가 프랑스로부터 돌아와 처음 시도한 작업은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열린 “도시와 영상전”에 제시된 거리설치작업 <3개의 버스정류장>이었다. 이 작업은 파리에서부터 이어져 이 시기의 작업들까지 관통하고 있던 인식 내지 관심사를 반영하고 있었다. 즉 현대 소비사회의 미디어들에 의해 생산된 시각환경이 우리들의 시각체험을 길들이고 지배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의 굳어진 신체적 감각을 자극하고 교란하는 것을 통해 이러한 지배의 조건들을 드러내거나 전복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상황주의자의 영향을 짐작케하는 이러한 인식 내지 관심은 <3개의 버스정류장>에서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겨진다. 작가는 IMF로 비어버린 정류장 홍보판을 주목하고, 이 홍보판에 통상 기대되는 상업적 목적을 가진 이미지들이 아닌 작가가 고안한 이미지들을 선택하여 배치한다. 이는 메시지들이 무차별적으로 경쟁하며 퍼부어지는 기존의 도시공간에 일종의 ‘간격’ 혹은 ’차별성‘을 제시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정류장의 상황 조건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토대로 고안 배치된 이 이미지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사물화된 시각 체험 방식과의 충돌을 경험하게 한다.
이러한 방법론은 다음 해 인더루프에서 열린 개인전 “스크린 드럭스”에서도 마찬가지로 실행된다. 여기서 초점은 특히 컴퓨터에 의해 생산되는 이미지의 권력, 즉 사물과 존재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혼란에 빠뜨리고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을 자신들이 현실 변형 방식 즉 시물레이션 방식에 종속시키는 이미지-가상의 세계의 위력에 있다. 작가들은 여기서 하얀 종이 위에 프린트 되어 있는 이미지들을 벽의 하얀 색 속으로 사라지도록 배치하는 가운데 사람들이 그러한 이미지의 권력을 체험으로 확인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관람객-구경꾼으로서의 관객 개념을 거부하고 이들의 신체 감각을 도발하여 적극적인 상황-체험으로 이끌려는 이러한 류의 지향은 99년 문예진흥원 미술관 설치된 <사회적 고기>나 2000년 인사미술공간에서의 <주관적 이웃집>에서도 반향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적 고기>의 경우 이번에는 초점이 시각환경으로부터 전시장 자체로 옮겨진다. 즉 여기서 전시장은 일종의 행정적이며 제도적인 감시 체제로 드러나며, 관객들은 감각적, 기호학적 전복을 통해 이를 확인하도록 유도된다. 예를 들어 4개의 상호 독립된 그러나 상호 연계시켜 읽을 수 있는 설치물로 이루어진 이 작업의 한 부분은, 전시장에서 사용되는 온갖 행정사무용 물품들을 빌어와 그것으로 둥그렇게 토끼우리를 만들고 2주 동안의 전시기간 내내 두 마리의 토끼를 사육하는 작업이다. 토끼의 배설물과 냄새가 우리를 넘어 퍼져나가고 가끔 우리를 넘어 달아난 토끼들은 다시 잡아들여진다. 작가와 제도의 관계에 대한 알레고리(토끼는 감시에도 불구하고 배설물을 싸고 냄새를 피우며 잡혀 돌아와도 또 다시 도망간다)로도 읽히는 이 설치는 관람객-구경꾼의 수동성에 머무르고 있는 미술관 관객들로 하여금 미술관(미술생산기구)에 대한 일신된 자각을 이끌려는 시도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이렇듯 미술관의 전시 초대라는 관행을 미술관 제도에 대한 자의식적 저항 내지는 도발적인 비판의 기회로 활용하는 작업은 이후에도 지속된다. 포스코 미술관에서 진행된 전시 “넥타이부대의 점심시간”에 제시된 <스틸갤러리 별관이야기>(2001)나 갤러리 스페이스 C에 출품된 (2005) 같은 작업들이 그렇다. 전자의 경우 그녀는 회사 측의 주간 뉴스레터에 자신을 늑대와 대결하는 동화 속의 "붉은 망토 아가씨(Lttle Red Riding Hood)"로 나타내는 사진 소설 형식의 스토리보드를 만들어 연속 게재한다. 미술관에로의 진입에 대한 자의식적 갈등을 겪는 작가의 분신인 아가씨는, 이 기업에서 운영하는 미술관과의 접촉하는 과정 그리고 이 미술관의 실체를 파악해 가는 과정에서, 현실과 예술행위 사이의 간극을 끊임없이 확인한다. 그리고는 결국 늑대에게 잡아먹힌다. 후자는 갤러리에 맨홀뚜껑, 가로등 등 도시의 시설물들의 피부를 라텍스로 떠서 제시한 작업이다. 사람의 피부를 아름답게 만드는 필링 행위를 공공적인 도시의 시설물들에 적용하고, 그로부터 생겨난 결과물들을 화장품 회사가 운영하는 갤러리에 전시한 것은, 일종의 유머나 풍자를 감지할 수 있게 하지만 동시에 사적인 것과 공공적인 것의 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상황은 상황을 창출한다
약 3년 간의 프랑스 체류 이후 2003년 그녀는 피진 콜렉티브 Pidgin Collective를 결성한다. 이미 이전에도 공동작업을 지속해왔지만 이제 피진 콜렉티브의 일원이자 남편이 된 프레데릭 미숑 Frederic Michon과 임민욱은 명실상부한 하나의 공동작업 팀이 된다. 피진 콜렉티브의 목표는 “예술계라는 하나의 영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 내부에서 상황을 교란시킬 새로운 상황을 창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목표와는 별로도 이들의 구체적인 작업 양상에서 드러나는 새로운 특징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예전보다 협업과 공동작업이 더욱 강조된다는 것, 따라서 피진 콜렉티브는 대체로 작업의 기획자로 참여하지만 협업 과정의 일원이 되기도 하며, 게다가 이 협업 과정 자체는 미리 계획되지 않은 채 유동적이다. 다른 하나는 이전에 비해 퍼포먼스의 성격이 강하며, 비미술적인 일상에 더 가까이 다가간 작업들이 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이제는 더욱 모든 것이 임시적이며, 과정적이고, 관계 자체 즉 상호작용 자체에 집중된다. 그리고 단지 기록물이 남는다. 한마디로 개인적 창조성이 아닌 대화적 창조성에 방점이 찍히며, 미술이 아니라 삶을 증진시키는 것이 일차적이다.
마로니에 미술관에서 실행된 <로스트? Lost?>(2003)는 피진 콜렉티브 작업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작업은 지극히 단순하고 심지어 허망하기까지 한 아이디어로부터 유출되었다. 미술관 옆 빈 공간에 두 개의 빈 콘테이너를 연속하여 설치하고, 일종의 현장 사무실 같은 이곳에 전시와 관련된 사람들 혹은 행인들, 노숙자들 또 예정 없는 대중들 시민들이 모여 앉아 쉴 수 있는 쉼 터 같은 것을 만든다. 그리고는 경직되고 고정된 프로그램이나 분명한 목표를 따르지 않고 그때그때 갑작스런 기획이 이루어지는 가하면, 실행되기도 하고, 아무런 일이 없기도 하다. 이 작업은 그야말로 일상 자체의 자연발생적인 활동의 리듬을 따르면서, 그 자체의 모순을 노정시킨 채 진행된다. 예술에 대한, 삶에 대한, 작가에 대한 그야말로 자연스럽고 절실한 질문들이 떠오르는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가 아닐까?
하자쎈터 운동장의 컨테이너를 중심으로 벌어진 <스크랩 프로젝트 Scrap Project>는 2004-5년을 걸쳐 이루어진 여러 작업들을 총칭하는 용어이다. 프로젝트의 목표는 하자쎈터의 학생 주체들의 문화작업가로서의 생존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사람들을 초대하고 능동적으로 아카이브를 구성하며 궁극적으로 새로운 방향성의 모델과 툴을 개발하고 공유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지율 스님을 초청하여 얘기를 듣기도 하고, 이주노동자 영상물을 제작하는 믹스 라이스와 이주노동자들을 초빙하여 그들과 직접 맞대면하기도 한다. 그저 수동적으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초빙한 사람들에 대해 미리 조사하고 그들의 사회적 의미를 확인하며 또 그들의 활동양식을 따라 직접 작업을 해보기도 한다. 대안관광가이드북 은 이러한 작업 과정에서 나온 책자이다. 일종의 관광안내서 형식을 빌어 가리봉동의 역사와 다문화적 현재에 대해 민족지적 탐색을 시도하는 이 책자는, 가리봉동을 단순히 지리적 공간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삶의 장소로 이해하면서 우리의 사회적 기억을 확장시킨다.
이 연속 프로젝트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작업 사례는 <테너와 고구마>(2005)이다. 이 작업은 공사 중인 하자쎈터의 운동장 한 쪽에서 사람들이 고구마를 구워 먹는 가운데 테너 가수를 초빙하여 온동장 다른 한 쪽에서 노래를 부르게 한 작업이다. 이 장난스럽고 황당한 아이디어는 고정된 일상의 닫힌 체계를 내파시키는 썰렁한 상황을 창출한다. 메케한 연기로 뒤덮힌 속에서 퍼져나간 아리아가 끝난 이후 사람들은 잘 익은 고구마를 나누어 먹었다고 한다.
피진 콜렉티브의 작업 중 또 하나 특기할만한 것은 <피켓>(2006)이다. 이 작업은 평택 대추리의 미군기지 확장 시위를 경험하면서 저항의 매뉴얼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로부터 생겨났다. “피켓-비폭력 저항 매뉴얼”이라는 제목의 이 책자는 ‘던지다’, ‘들다’, ‘나눠주다’, ‘분장하다’, ‘쓰다’ 등 총 9개의 장으로 나뉘어있다. 흥미로운 것은 각 장의 구성이다. 예를 들면 던지는 방법이나 나누는 아이템에 대한 소개 뿐만 아니라 관련 이미지들, 도표들, 역사적 사례들, 이러한 행위의 의미들 등 다양한 층위의 정보들이 유머러스하게 제공되고 있다. 일종의 행동주의적인 접근을 보이는 이 작업은 피진 콜렉티브의 정치적 지향을 짐작케하는 한 사례이다.


여기가 어디지?
2000년 그녀와 프레데릭은 광주 비엔날레로부터 외국인들을 위한 문화안내 책자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받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소장한 축적된 사진들을 떠올렸고, 그것들을 꼴라쥬하여 소형 책자 <롤링 스톡 Rolling Stock>를 만든다. 외국인들이 안내받아야 할 한국의 문화란 어떤 것일까? 그것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문화 명소나 또 다른 그럴듯한 볼거리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들은 속도라는 키워드에 주목했다. 그리고 이동 수단을 선택했다. 움직이는 것은 자전거, 오토바이, 자동차, 기차, 배뿐만이 아니다. 손수레, 카트, 포장마차, 진열장도 움직인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사람의 몸과 짐과 그리고 생활을 운반해 낸다. 그것은 틀림없이 “다이내믹 코리아”(한국의 국가 브랜드 구호)를 보여주지만 그러나 일종의 반어법을 통해 보여준다. “정지하는 것은 곧 죽음이다. 같은 의미에서 최선의 방어는 쉬지 않고 항상 움직이는 것이다."(보벙, Vauvan) 이곳에는 안정된 삶이 없다. 그러나 삶은 있다.
임민욱은 한 인터뷰에서 (다시 돌아온) 한국에 대한 느낌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과거의 흔적은 물론 볼 수 없을 뿐더러 현재의 모습은 인식하기도 전에 이미, 동시에 지워나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데쟈 뷰-Deja vu’ 현상이 아니라 ‘데쟈 디스파뤼- Deja dispau(눈앞의 현실에서 그것의 죽음을 보는 것-필자)’ 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가?” 사물과 장소가 사라진다는 것은 그것에 함께 부착되어 있던 의미있는 기억 또한 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기억은, 그것이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그것이 생겨나고 지속되던 물리적 환경의 지속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따라서 기억의 소멸은 뿌리 뽑힌 삶으로 이어진다. 에드워드 랠프(Edward Relph)는 이러한 상황과 관련하여 “인간답다는 말은 곧 자신의 장소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장소를 잘 알고(기억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물론 삶에서 변화란 불가피하다. 사물과 장소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 변화의 속도가 혹은 그 방식이 사람들의 의미있는 참여를 허락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자신이 뿌리 뽑힌 삶, 인간답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고 느낀다. 게다가 그 속도와 방식이 새로운 장소와 사물이 태어나자마자 죽음을 예비하는 수준에 도달하게 되면, 도처에 신경증과 병증이 만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극도로 빠른 속도로 지속된 한국의 근대화는 아직도, 마치 그 배후에 이 모든 것을 지속시키는 알 수없는 유령이 떠다니고 있기나 한 듯이, 계속되고 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유년기부터 대학시절을 보낸 곳과 현재 살고 있는 구역 모두가 뉴타운사업 개발구역에 포함되어 있다. 임민욱의 <뉴 타운 고스트>(2005)는 이러한 현실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분열과 혼돈에 대한 고백이자 고발이며, 저항이자 선동이다. 이 작업은 작은 트럭 위에 드럼과 드럼주자 그리고 슬래머(slamer: 슬램은 랩/힙합의 바탕을 이루는 한 요인으로서과 시의 혼합장르의 성격을 지닌다-필자)를 싣고 그녀의 집과 사무실이 있는 영등포의 재개발 구역을 순회하며 래퍼가 공연하는 모습을 담은 비디오 작업이다. 새로 세워지는 주상복합 아파트와 쇼핑몰, 시장, 골목길, 공사장, 상가가 혼재된 이 구역을 일정 경로를 따라 돌면서, 여성 슬래머는 마치 유령을 불러내어 접신을 시도하기라도 하듯, 작가가 쓴 글귀들을 형식으로 부르짖는다. 그리고 그 글귀들은 마치 억압된 목소리가 분열증적으로 터져 나오듯 저 밑으로부터 오늘날 이곳 소비정보사이버글로벌지식개발적 혼성 사회에서 느낄 수 있는 욕망과 환멸, 공포와 환영들을 쏟아 놓는다. 돈, 피부, 성형, 수술, 백화점, 뉴타운, 새마을, 컴플렉스, 비즈니스, 업무복합, 팔기, 사기, 전봇대, 동네 한바퀴....
앞서 말했듯이 속도는 기억을 남기지 않는다. 다시 말해 망각을 조장한다. 그리고 이 기억 없는 망각의 장소에는 모든 것을 딱딱하게 굳혀 버리는 이데올로기의 기념비가 세워지기 쉽다. 실상 무엇을 기억한다는 것은 구멍이 숭숭 뚫려 이물질이 드나들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과 같다. <잘못된 질문>(2006)은 하나의 화면에 두 대의 비디오 프로젝션이 화면을 반씩 나누어 진행되고, 동시에 택시기사의 내레이션이 진행되는 작업이다. 화면의 한쪽은 기본적으로 택시에서 보는 풍경이 이어지고, 다른 한쪽(혹은 양쪽)에서는 빌딩, 자동차, 홍수, 아파트, 아이 등 극히 일상적인 현실의 풍경들이 이어진다. 기사의 내레이션에 덧붙여 가끔씩 TV에서 나오는 소리 아이의 소리 등이 겹쳐진다. 그리고 작가는 이 화면을 발코니에서 내려다 볼 수 있도록 설정하고 방을 구성했다. 기사의 내레이션은 노인 세대의 철저히 우파적인 근대사에 대한 해석이다. 이승만, 박정희, 용단, 고난의 극복, 미국, 사회주의 정권들(DJ, 노무현), 다시는 예전의 비참한 시대로 돌아갈 수 없음... 작가는 관객들이 화면에 펼쳐지는 현실의 상황과 이 내레이션과 함께 비교하면서 능동적으로 이 서로 다른 층위의 현실들에 대한 해석을 짜맞추기를 바랬던 것 같다. 사실 기억하기는 “결코 자기반성이나 회고와 같은 정태적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외상을 이해하기 위해 조각난 과거를 짜맞추어 보는 것, 고통스러운 다시-떠올림이다.”(호미 바바)


나는 누구인가!
2007년 임민욱은 에르메스 미술상 후보전에 <너무 이른 혹은 너무 늦은, 아틀리에>라는 설치작업을 전시한다. 그리고 상을 수상한다. 그녀는 이 상에 대해 ‘포상된 실패’라고 말한다. 그래서인가? 나는 이 작업을 이 혼란된 조국(?)의 작가의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어 보고 싶어 진다.
바닥에는 라텍스로 만든 카페트 혹은 그냥 바닥천이 놓여있다. 이 바닥천을 작가의 노동이 이루어지는 하나의 장소, 마치 임시거처 같은 이동성의 장소로 읽을 수 있을까? 그 옆 위쪽으로는 아파트로부터 추출된 화려한 무늬의 날아갈듯 걸려있는 자동차 커버(우리는 자동차를 좋아한다), 커버의 안쪽은 조각난 천들을 이어누빈 퀼트(생활과 진실). 바닥천의 또 다른 옆쪽에는 냉장고가 열려있고 그로부터 터져 나오는 핑크빛 발포성 우레탄 덩어리(사랑해요~ LG, 사랑해요~ 자이, 사랑해요~ 당신), 냉장고의 몸체와 창가를 걸쳐 착시현상을 일으키며 돌아가는 뺑뺑이 무늬(골라골라, 찍어찍어), 뒤쪽으로는 피켓 혹은 삽 하나. 거기에는 NO 혹은 ON이라고 쓰여 있다.(오 노!) 그리고 뒤쪽 벽에 돌출된 서랍에는 작업을 위해 전시장 바닥에 깔았던 펠트천이 들어있다.(작가는 이 전시를 위해 현장에서 작업을 했다!) 그리고는 TV 모니터. 그 모니터 속의 충무로 인쇄 골목 제본걸의 풋풋한 사랑, 노동, 그리고 꿈을 암시하는 영상.
제본걸은 마지막 부분에서 스스로에게 이야기한다. “난 제대로 할 수 있는게 아무 것도 없지만 그래서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난 뭘 하든 늘 딴 생각을 하고 있지” 그리고는 마지막 멘트. “내 이름은 아이엔지(ing).” 빙고!


정지하면 죽는 속도의 사회에서는 강도 높은 시공간 압축으로 인해 일종의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성’ 현상이 생겨난다. 시간의 혼재. 이곳에서는 전근대와 근대, 포스트-근대가 마치 이웃처럼 한 장소에 공존하는 가하면, 우리의 몸속에, 머리 속에, 가족 속에, 그 가족의 관계 속에, 미술 속에, 국가 속에 그 체계들 속에 혼합되어 공존한다. 따라서 서로 다른 시간이 혼재하는 이곳에서 모든 것은 항상 너무 늦거나 너무 이르다. 시대 착오 혹은 시간 착오는 일종의 이곳의 존재 조건이다. 이러한 상황을 의식적으로 느낀다면 더 더욱.
이렇듯 혼재된 시간과 문화의 착종된 상황을 그린 이 작업에서, 임민욱은 제본걸의 목소리를 빌려 이야기한다. 내 이름은 ing. 그녀는 정지하면 죽는 이곳에서 ing하고 있다고 아니 ing 할 수 밖에 없다고, ing하자고, 스스로에게 조국에게 이야기하는 듯하다. 근대도 전근대도 포스트-근대도 어느 것 하나 잘하고 있지 않지만. 그래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항상 또 다른 것을 생각해야 살아남을 수밖에 없지만 항상 또 다른 것을 생각하며.
나는 문득 그녀의 작업들이 그간 이곳의 사회와 미술의 문맥에 적합한 작동력을 갖추어 온 것임을 느낀다. 그녀는 이제 상황을 옆에 두고 있다.




*이 글은 다음 글들을 직접적으로 참조하였으며, 부분적으로 표현이나 아이디어를 따서 쓴 곳들이 있다.

<참고문헌>
강수미, [네 이웃의 미술, 명작에 반하여], {월간미술}, 2007년, 4월호.
김장언, [예술가의 변이], Space, 2004년, 11월호.
김장언, [상황에 대한 진실은 없다],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 2007
문영민, [폭력과 모더니티: 기억의 재각인], {모더니티와 기억의 정치}, 현실문화연구, 2006
인터뷰, [임민욱과 김선정의 인터뷰], 미출간
임민욱&프레데릭 미숑과 김원방, [대담: 시각, 신체, 공간의 문화적 경계들을 찾아서]. {미술과 담 론}, 2000년 여름호.
크리스티나 리쿠페로, [작가 임민욱의 삶의 미술],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