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민욱과 프레데릭 미숑: 시각, 신체, 공간의 문화적 경계들을 찾아서
대담_ 김원방, 미술평론가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되는 ‘포트폴리오’란은 최근의 젊은 작가들 중 독자적인 문제의식과 시각어법으로 주목 받는 작가를 선정하여, 그들의 작업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란이다. 임민욱(1968년생)과 프레데릭 미숑(1967년생)은 면밀한 기획에 입각한 공동작업을 실행하는 작가들로서, 한국에서는 99년 대안공간 인더루프에서의 전시, 그리고 99년 미술회관의 <신세대흐름전>등에서 시각문화에 대한 문제의식이 짙은 작업들로 주목 받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그들이 행한 공동작업들 중 대표적인 작업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편집자)

김원방(이하: 김): 당신들의 작업에서 현저히 눈에 띄는 것은 시각 이미지와 공간의 사회적 소통의 조건들, 그리고 이것들과 경험적 주체 사이에 일어나는 역동적 경계의 탐구이다. 여기에 더해서 또 한가지 특징으로는 상당히 체계적이고 때로는 개념적인 접근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90년대의 한국 미술의 흐름은 항상 그래온 바이긴 하지만, 미국을 wd심으로 한 신체예술의 짧은 영향을 받아 충격적 효과가 강한 이미지나 오브제의 일회적 효과에 지나치게 의존한 경향이 많았고, 이런 면에서 볼 때 문화기호들에 대한 면밀한 탐색과 기획과정을 중시하는 당신들의 작업은 한국 관객들에게는 조금 생소해 보였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작업들의 발단에 대해 알고 싶다.

임민욱_프레데릭 미숑(이하: 임_미): 사실 외적인 공간, 시각이미지들과 경험하는 주체 사이에 이루어지는 문화적 소통에 대한 관심은 94년 최초의 공동작업인 <사진적 이야기 Recit Photographique>를 발표한 이후로 우리의 지속적인 공동작업 주제가 되어왔다고 볼 수 있다.
<사진적 이야기>는 우리가 파리에서 아침에 출발하여 파리 근교의 한 지점까지 도보와 자전거, 자동차 등을 수단으로 여행하면서 일어난 일이나 사람과의 만남, 지리적 문화 등에 대한 일련의 실제적 경험을 다큐멘터리와 사진소설(photoroman)이 혼합된, 하나의 서사적 형식으로 제시한 작업이다. 우리는 우리가 마주치고 주목하게 되는 각 현장에 대해 곧바로 관련된 역사적, 문화적, 지리적 정보들을 기록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정보들을 채집하고 이 과정을 통해 그들 삶의 사적(私的), 지역적 차원을 복원해나감으로써, 대중매체가 지닌 익명성과 집단성의 한계를 극복해보고자 한 시도였다. 결국 그 작업의 목적은 타자에 대한 앎과 소통의 한계를 넓혀가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작업과는 좀 대조적으로 보였지만 1997년 프랑스 스트라부르(Strasbourg)에서 개최된 Selest’art 비엔날레에 출품한 작품 Funky Town 역시 그러한 문제들을 다각도로 접근하려는 시도의 하나였다. 이 작품은 관객이 그 안으로 들어가도록 되어있는 구조이다. 여기서 모피와 거울은 매우 상충되는 신체적 감각을 주는 두 가지의 재료이다. 관객이 그 안에 들어가고 나오는 과정 속에서, 특히 밖으로 나온 자신의 머리와 자신을 둘러싼 거울 반사들, 그리고 천정에서 반사되는 어지러운 빛 등에 의해서 일종의 신체적 감각의 교란을 경험한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추상적이고 관념화 되기 쉬운 ‘몸’이라는 것에 대해 그 존재의 감각을 새로이 부각시키려 한 것이다. 반사하는 거울평면과 공간 속에서의 사람들의 소통을 통해 공간이란 것을 감성, 지각, 개념들이 새롭게 얽혀 이루어낸 실타래로 드러나고, 관객의 몸을 개입하도록 연출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몸을 ‘감각하고, 지각하고, 사유하는 몸’으로 새로이 되묻게 하는 것이다.

김: 몸에 대한 감각이 돌발적으로 ‘재창조’되고 신체라고 하는 관념이 혼돈 속에 ‘지연’되어나가는 그런 장소라고 규정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90년대 이후 국제적으로 번성한 신체예술들의 한계는 몸에 대한 ‘재현정치’나 후기식민이론적 접근에로만 몰려들어 ‘몸의 외적이고 사회화 된 이미지’에만 지나치게 빠져있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몸을 주제로 한 작업’하면, 몸의 이미지나 도상이 무조건 전면에 강하게 제시되는 또 다른 관념론적 고정관념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이것이 바람직하지 못한 ‘몸의 세속화 혹은 키치화 현상’이라고 비판적으로 규정해보고 있다. 그러한 키치화의 한계는 바로 몸을 가장 총체적 존재조건에 대한 인식을 방해하는 일종의 ‘맹목(盲目, aveugliment)’과 ‘맹목적성’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는 것이다. 이러함 지점에서 당신들의 작업이 주의를 끈다면, 그것은 가장 원초적이고 비정형적이고 비가시적인 몸- 흔히 ‘현상학적 경험의 주체’라고 표현하는- 을 기본전제로 하여, 이로부터 문화적 사회적 기호학적 소통의 경험까지 연결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사진적 이야기>, 그리고 같은 작업도 그러한 경우라고 생각한다.

임_미: 그렇다고 볼 수 있다. 99년 인더루프에서 전시한 는 오늘날의 압도적인 시각환경의 생태를 단순히 관찰하거나 이해하는 입장이 아닌, 몸을 가진 주체의 입장에서 느끼는 바를 드러내려 한 것이다. 시각이미지라 물질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 자체의 상품성은 없는, 추상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모든 오브제는 오직 이미지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간계에 이르렀다. 이미지를 가지고 작업할 때 흔히 쓰이는 컴퓨터 프로그램들 Photoshop이나 Querk X-press등 은 그렇게 보는 방식과 현실을 변질시키고 있다. ‘인더루프’라는 대안공간은 지나가면서 보는 공간이 아니라, 좀더 오랫동안 사람들이 머무를 수 있도록 유도된 공간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미지가 물성을 잃고 하얀 종이 위에 프린트되어있는 이 이미지들이 벽의 하얀색 속으로 사라지면서 그렇게 ‘이미지/상상’의 권력만이 체험되기를 시도했다.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생활방식을 만들어가는 하이테크놀로지가 초래하는 존재와 사물 사이의 혼동을 관찰하고, 보편화된 합성이미지들에 의해 파급되는 육체적, 심리적 경험들을 제시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는 현실 자체를 거리를 두고 보는 일종의 필터와 같은 장치를 제안하는 것이다.

김: 나는 그 작품 여기저기에서 산재하는 약물들의 이미지는 약물 ‘이미지’를 직접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의 약물성이나 중독성’을 알레고리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느꼈다. 약물중독이란 전형적인 신체적, 관능적 현상이고 그런 의미에서 그 작업은 우리가 이미지에 대해 관능적으로 접속되고 변환되고, 때문에 함몰되어 중독되는 오늘날의 테크놀로지적 시각환경의 생태성을 잘 시사해주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러한 주제의식, 즉 현대의 미디어적 시각환경에 대한 문제의식이 1998년 <도시와 영상: 의식주 전>에서 버스정류장에서 설치한 작업인 <3개의 버스정류장>, 그리고 99년 <사진은 우리를 바라본다>에 출품한 같은 작품에서 계속 탐구되고 있음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임_미: <3개의 버스정류장>은 광화문 시립미술관 앞을 지나가는 세 곳의 버스정류장에서 상업적 홍보의 목적을 띄지 않는 이미지들을 적절한 위치설정과 논리적 구도를 통해 제시함으로써, 기존의 도시공간에 일종의 ‘간격’과 ‘차별성’을 투여하려 한 작업이었다. 메시지들이 무차별적으로 반복되고 경쟁하며 혼재하는 상황 속에서 일종의 ‘충돌’의 계기를 제시하려는 것이다. 그 이미지들은 매번 정차하고 왕복하는 버스의 정규적 운행을 통해 마치 시각적, 공간적, 정신적 매듭처럼 분절된 경험으로 부각된다. 역시 우리의 시각적 체험을 길들이고 지배하는 조건들을 드러내려는 작업이다. 여기서 모든 사진들은 우리들 자신을 모델로 찍은 사진들과 텍스트이다. 벽에 걸려있는 입간판처럼 직각으로 세워 걸었다. 이로부터 사진에 일종의 공간적 방위개념, 흐름 같은 것이 생겨난다. 이 사진들은 복도를 따라 배치되어 있으며, 관람자들이 이 사진들을 보기 위해서는 조각작품을 보듯 몸과 시선의 변화를 동원해야 한다. 사진의 구체적 내용은 마술적이거나 혹은 장난스럽고 무의미한 것들이다. 냄비가 공중에 떠있다든가, 앉아있는 내 몸의 다리가 네 개 라든가 하는 식의 비현실적 환영 같은 것들이다. 즉 조작된 효과를 의도적으로 강하게 드러낸 이미지와 텍스트들로써 우리가 인습적으로 기대하는 사진적 내용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김: 나는 그 사진들이 ‘완벽하게 소비되는 이미지’이기를 거부하면서 일종의 ‘非 사진적인 경계’를 지향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았다. 그 사진설치는 기존의 사진들처럼 단순히 가상적 이미지의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 신체적, 실제적인 지리학과 위상의 차원을 가지고 있다. 즉 그 이미지들은 ‘사진처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숲 속을 헤매듯이 신체를 개입시켜 경험해야 하는 모호한 ‘신체적 여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그것이 담고 있는 기이한 이미지들이 더해져서 결국, 전체적으로는 일종의 ‘시각의 함정’ 혹은 ‘시각의 전능함에 대한 함정’같은 것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 ‘벽에 사진을 건다.’ 라는 이 보편적인 설치방식은 공공적 공간 속에서는 이미지들을 통해 우리의 시각과 현실인식을 조절하기 위한 장치로 작동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벽’이나 ‘교통 통제선‘의 일종의 시각적 연장물이고 이 연장물을 통해 우리의 개별적 사유에 개입하는 것이다. 즉 공공 공간에서의 사진은 보여주는 민큼 감추고, 적절한 경계를 설정하는 또 하나의 벽의 역할을 하게 되며, 이를 통해 사적인 신체와 시적인 시선의 모호하고도 전복적인 영역을 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임_미: 그 작품을 포함해서 <3개의 버스정류장>도 같은 문제의식 속에서 작업한 경우이다. “어떻게 시각이라는 수수께끼가 구성되는지, 어떻게 안 보이는 것이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고, 사물들과 전재들이 서로를 이끌어나가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도록 유도하는 것 말이다.

김: 한편 99년 미술회관의 <신세대흐름전>에 냈던 작업인 <사회적 고기 Social Meat>에서는 다른 작업들에 비해 공공화된 코드의 잡다한 의미들과 그 작동방식에 더욱 깊숙이 개입하려는 의도가 두드러졌다고 본다. 사회적 고기란 제목도 매우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임_미: 사실 ‘고기’는 우리 공동작업의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이고 그것의 의미에 대해 상상적 인터뷰를 만들어 본 적도 있다. 작품 <사회적 고기>는 서둘러 볼 경우 놓치기 쉬운 부분들이 있어 좀 상세한 성명이 필요할 것 같다. 이 작품은 미술회관의 입구와 전시장, 창고 등에 흩어져있는 4개의 설치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전체적인 체계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미술관 건물 외벽에 현수막으로 걸려있는 <전제-예견-체취를 통제하기>, 2층 전시장 입구 맞은 편 창고에 설치된 <냄새사무국>, 1층 전시장 입구의 바닥과 벽, 천정을 점령한 <착한 야만인>, 마지막으로 전시장 내부에 설치된 <냄새 사무국-별관>이다. <전제-예견-체취를 통제하기>라는 현수막의 경우, 이것은 이미 그 자리에 결려있던 “문화의 세기가 오고 있다”라는 현수막 위에 덮어씌운 것이다. “절제-예견-체취의 통제”라는 문구는 그림기호(픽토그램)나 정보의 성격이 없는 단어들로써, 그것이 지니는 의미론적 편차를 이용해 원래의 공공적 표어가 줄 수 있는 의미를 한층 더 모호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원래 ‘절제’, ‘예견’, ‘체취의 통제’는 모든 문명사회에서 관찰되는 전형적 요소들이다. “문화의 세기가 오고 있다.”라는 슬로건에 대하여 “ 그 문화가 어떻게 범람할 것에 대한 ‘절제’”, 그로 인해 잃게 될 것에 대한 ‘예견’”, 문명이 발달할수록 통제되는 ‘냄새’라는 문구를 행정부의 문구를 반전시키는 맥락으로 사용하였다. 2층 창고에 설치된 <냄새 사무국>은 미술회관의 전시 카탈로그 저장창고를 붉은색 형광등과 방향제를 사용해서 일종의 정육점 혹은 사창가처럼 보이도록 변화시킨 것이다. 나는 이것을 예술행정의 과잉생산물이 잠들고 혼재하는 장소로 생각했다. 그리고 이러한 혼재의 상태를 부서별로 계열화하고, 악취를 풍기는 것을 막기 위해 ‘방향제’를 설치해 놓았다. 마치 정육점이나 사창가에서 팔리는 ‘고기’에 대한 처치방법처럼 말이다. 그 다음으로 1층 전시장 입구공간을 채운 설치작업인 <착한 야만인> 역시 정육점과 사창가의 분위기를 응용한 것이다. 바닥에는 ‘인조고기’, ‘인조보석’같은 것이 깔려있어 관객은 이것을 밟고 지나가게 된다. 이것은 ‘오염된 공간’과 ‘오염되지 않은 공간’의 경계를 이루는 일종의 ‘소독공간’ 같은 곳이다. 달리 말하면 신체를 ‘실험/시험’하고, 신체의 적응과 비적응에 대한 테스트가 이루어지는 공간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시장 내에 설치된 <냄새사무국-별관>은 미술회관에서 사용되는 온갖 행정사무용 물품들을 빌어와 이것으로 토끼우리를 만들고 2주 전시기간 내내 두 마리의 토끼를 사육하는 작업이다. 토끼가 배출하는 배설물과 냄새, 이에 대한 예술행정적 감시의 시선, 그리고 이러한 감시의 시선을 또다시 감시할 수 있도록 하는 전도된 게임이 이 작업에서 의도한 내용이었다.

김: 정육점이나 창녀촌이란 공간은 실제로 냄새와 오염에 대한 감시적 시선, 혹은 시각의 정치학이 가장 강렬히 작동하는 곳이다. 그래서 그곳 전시장에 진열되는 것은 오직 적응되고 오염되지 않은 ‘고기’, 적확히 말하면 그렇게 ‘담론화되고 재현된 고기의 기호’들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정육점-사창가 공간’이 미술회관의 일부를 점령하는 모순된 양태는 일종의 불경스런 비밀의 발설행위와도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공공의 권위’를 위한 매끄러운 행정의 기호들, 나아가 정치적으로 구축된 주체들 ? 아마도 우리들 자신이겠지만 ? 이 ‘비가시적’으로 행하는 공간문화정치와 이것의 권력적 시선을 그러내면서 동시에 그 통제된 표면위로 분출하는 순수한 야만인의 몸(고기)냄새 같은 것 말이다. 한편 정육점이나 사창가 같은 공간연출에 대해서는 위와 같은 문화적 해석이 당연히 성립하겠지만, 나 나름대로는 그런 연출이 기존의 공간에 대우 강력한 ‘환상적(fantastic) 효과’를 부여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면이 의외의 색다른 의미와 해석을 가능케 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붉은 조명의 <냄새사무국>이 발하는 ‘환상적 느낌’은, 전체적으로는 초현실주의 미술의 강령 중 하나인 ‘발작적 아름다움(Beaute convulsive)’같은 것을 연상시켰다. 즉 그러한 공공적 공간의 흐름에 어떤 ‘관능적이고도 주체할 수 없는 충돌과 발작’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느낌 말이다. 나는 예술에 있어 환상적 측면이란 것을 ‘현실성의 부재(不在)’가 아니라 ‘부재의 현실성’이라고 정의하는데,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환상은 순간적으로 현실의 통사적 구조, 혹은 의미론적인 맥락을 무너뜨리는 블랙홀(충만한 부재로서의) 같은 것이다. 즉, 기존의 공간이 그러한 정육점이나 사창가 특유의 ‘환상적’인 외양으로 둔갑하는 순간, 현실의 맥락 속에 ‘해독 불가능성(illesibility)’의 계기가 생겨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환상’이 지닌 파괴적 에너지라는 것이다. 한편 <사회적 고기>에서 보여준 밀도 있는 현장개입의 측면은 당신들이 97년 파리의 아리케비치 화랑에서 전시했던 매우 특이한 공동작업인 <무슨 이윤율의 하락? Quelle baisse du taux de profit?>에서도 흥미롭게 나타난다. 그 작업의 구체적 진행과정을 듣고 싶다.

임_미: <무슨 이윤율의 하락? Quelle baisse du taux de profit?>은 2부로 구성된 작업으로서 현실에서 발생하는 실제사건과 관련성을 지니며 진행된다. 그것은 우선 1997년 프랑스 의회선거의 제1차 선거에 맞추어 전시의 ‘1단계’가 시작된다. 그리고 의회선거의 제2차 선거와 끝나는 직후 전시를 오픈한다. 여기부터가 전시의 ‘2단계’로서 오픈 한 직후 설치물의 상태는 다르게 변경된다. <무슨 이윤율의 하락?>의 1단계에서 우리는 화랑공간에 상품포장용 박스를 가득 쌓아놓았다. 이 박스에 원래부터 인쇄되어 있던 상품명 위에 우리는 프랑스 정계 및 재계의 대표적 인물들(프랑스의 경제와 정치를 좌지우지하는)의 리스트를 만들어 상자마다 그 이름표를 붙였다. 유리창 위에 스티커로 붙여놓은 도해는 상품이 포장되어 나오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이 오브제들은 줄곧 화랑 문이 닫힌 채로 전시되었고, 전시는 밖에서만 볼 수 있을 뿐이다. 2차 선거결과 발표와 함께 <무슨 이윤율의 하락?>은 두 번째 단계에 들어서는데, 앞서 포장박스들을 마치 데모용 피켓처럼 막대기에 붙여 벽에다 기대놓았다. 우리가 포장박스 위에 스티커로 붙여놓은 정재계 실력자들의 이름은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있는, 정확히 말하자면 예술이든 뭐든 간에 함부로 공공 공간에서 호명할 수 있는 이름들이 아니다. 그들이 이루고 구축해 나가는 체제는 기본적으로 ‘재현 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의 성격을 지녔고, 이 작업은 그런 의미에서 ‘재현될 수 없는 것을 재현하는’ 지점에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김: 매우 ‘성상모독적’인 작업으로 다가온다. 신체적으로 접근할 수 없고 오직 밖에서만 바라볼 수 있게 함으로써, 갤러리는 창고이면서 동시에 ‘접근’이 차단된 권력적이고 성스러운 공간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중요한 점은 그렇게 포장박스로써 진열되고 호명된 권력의 이름들이 사실 이 자본주의 생산체계에서는 거의 ‘궁극적인 기의(記意)’, 즉, 거의 ‘신(神)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거의 일방적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관리하는 판옵티콘적 감시권력의 주체이다. 그들에게 함부로 시선을 돌리거나, 그들의 이름을 ‘재현’하거나 부르려 하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역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한 타부의 기호들 위에 다시 낙서처럼 쓰여진 단테의 신곡은 묘한 절망감과 묵시론적인 저항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마지막으로 최근에 진행 중인 작업들에 대해 알고 싶다

임_미: <서울 미디어시티2000>의 지하철 전시를 위한 <수직 지하철 프로젝트 Vertical Subway Project>를 진행 중이다. 이것의 기본구조는 광화문 전철역의 지하철 승강장의 한 지점과 그리고 이에 정확이 수직적으로 일치하는 지상(地上)의 한 지점을 찾아낸 후, 양 지점에서 서로를 받아볼 수 있는 수직 구멍을 뚫는 것이다. 물론 실제 구멍을 뚫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이를 비디오설치로 대신하게 될 것이고, 또한 여러 가지 그래픽적 이정표적 설치물을 더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 도시공간과 이동의 속성을 드러내고 또 변화시켜 보고자 한다. 지하철 공간에서는 지평선 같은 시각적 기준이나 이정표적 사물 등이 부재하는데, 이것은 곧 시점에 의존해 파악되고, 지상과 지하의 관계는 자의적인 것이 된다. 그 결과 지하공간은 단지 관념적 공간의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추상화 된 공간을 가로지르는 집적적이고 실제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지점을 만들어내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일차 목표이다. 지하철에 그러한 소통의 지점이 생긴다면 이것은 마치 순간적으로 구멍에 빠지는 듯한 경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곳’으로의 빠짐을 통해 관념화 되어버린 ‘지금 여기’의 공간이나 이동의 개념을 매우 현실적인 신체적 개념으로 바꾸는 것이다.

김: 이러한 작업의 중요한 특징은 좁은 의미에 한정된 ‘공간의 물리적, 건축적, 속성’이라는 모더니즘적 관점에서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삶, 문화, 내밀함, 지식의 유통과 상호변경, 대결, 욕망의 발산 등이 이루어지는 가장 포괄적인 장소로서 해석하고 이에 종합적으로 관여한다는 점이다. 사실 ‘공간’이란 것을 특정한 맥락, 예들 들면 아주 좁은 의미의 ‘신체적, 현상학적’ 경험의 장으로만 취급하려는 시도는 이미 미니멀리즘의 단계에서 거의 진부해질 정도로 고간되어 버린 것이다. 오늘날에는 물리적, 신체적, 문화적 기호학적 기호들이 이루는 총체적이고 혼성적인 의미의 공간경험을 모두 포괄하는 시도가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이 작업 또한 그렇게 생각된다. 오늘날의 삶의 환경을 이루는 시공간의 특징은, 끊임없이 우리의 신체와 정신을 그에 맞추어 ‘젠더화’, 즉 차별화하고 경계지워진 구조를 부과해 나간다는 점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그러한 젠더적, 관년적 경계들의 유동성을 드러내고 총체적인 감각을 끊임없이 회복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사실 진정으로 창조의 예술이란 새로운 생산이 아니라, 회복 혹은, 리오타르가 말하는 상기(想起, amamnese)의 행위라고 생각한다. 지하철 작업에 대해 단지 ‘건축적인 시공간’과 그것의 사소한 주변을 탐구하는 것으로 보는 선입견이 혹시 있다면 이는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즉, “특정한 장르의 시공간을 다루거나 부각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내부에서 발생하는 공적/사적인 정치의 경계들을 다루는 것이며, 우리의 경험이 발생하는 ‘불특정한 현실 전부’를 시공간으로 취급한다.” 라고 말이다.

임_미: 이미 <사진적 이야기 Recit Photographique>가 정확히 그러한 맥락 속에서 출발했다. 현재도 그러한 관점에서 입각하여 모색하고 있는 중인데, 얼마 전 대전 한림미술관에서 열린 <강경: Art History Image 전>에 낸 비디오 작업인 <우리는 운명과 협상하는가?>를 예로 들 수 있다. 과거 번성과 쇠퇴를 겪었고, 지금은 무모한 개발에 의해 파괴될 위험에 처한 역사적 도시 강경을 시공간으로 해서 이것을 다중적으로 횡단하는 의식, 아픔, 상념의 축을 드러내보려 한 것이다.

김: 오늘 당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 작업들에서 뻗어나가고 있는 더욱 다각적인 신경망과 운동에너지를 발견한 느낌이다. 앞으로 많은 좋은 작업 기대한다.

미술과 담론 2000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