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Talk_임민욱: 일단 멈춤 - 실체 없는 대상에 직면하는 방법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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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민욱의 작업에는 원망과 분노, 격정과 회한 같은 감정들이 혼재되어 있다. 정치와 예술의 모더니즘적 대립이 용도 폐기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앞에서, 임민욱은 저항의 언어 이면에 존재하는 복잡미묘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압축 성장의 광풍이 아직도 좌충우돌하는 이 사회 현실에 대한 그의 발언에는 대상을 적으로 간주하고 싶지 않은 번뇌의 흔적이 명확하다. 그가 배회하는 영역을 더듬어가다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미궁이 보일지도 모르겠다. <고원석 공간화랑 큐레이터>

The Weight of Hands, HD video & sound, single channel projection, 13'57", 2010
© Minouk Lim

고: 당신의 영상 작품에는 문장(작문, 언어)+퍼포먼스(공연)+비디오+설치 등의 복합적인 요소들이 혼재되어 있다. 그 다양한 요소들과 그것들에 부여된 긴 시간들은 마치 영화를 만드는 행위를 연상시킨다. 당신의 작업을 일종의 영화로 읽는 시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임: 내 작업의 동기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화 같은’ 현실을 마주했을 때 생겨났다. 그 어처구니없는 마주침의 이면에는 배후와 맥락을 품고 있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가 필요한 세계에서 그 무엇보다도 비이성적인 현상들이 펼쳐지는 역사의 고통을 들여다보면 그 역설적인 관계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너무 착해도 안 되고, 무엇보다 서열이 중요한 게 영화감독이었다. 촬영할 때 그런 현실이 참 힘들었다. 제작진과의 소통은 언어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객관성이라는 절대적 조건 아래 끊임없이 좌절을 겪어야 하는 구조 속에 내가 놓여 있었다. 2008년의 개인전 <점프 컷>에서 그러한 한계를 절감한 이후, Horn and Tail, Installation view at gallery Plant, 2010 공간계획과 오브제들이 영화적 스토리텔링을 구현하는 형식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게 되었다. 그래서 내 작업이 영화는 아니지만 영화 같은 과정을 거쳐 나온 결과라고 볼 수도 있겠다.

고: 모든 작품에서 당신의 글이 발견된다. 작품에 들어가는 글이 수준급이다. 글을 쓰는 이유는?

임: 물론 수준급은 아니고, 그렇다고 아마추어급도 아닌 애매한 수준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글쓰기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런 좌절감이 들면 꼭 글을 쓰게 된다. 그래서 문학이야 말로 가장 인간적인 스케일을 가지고 있는 예술 형식이라고 생각한다. 너무나 인간적인 그 실패를 거쳐야만 무언가를 떠올릴 힘이 생기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나는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열망이 있는 동시에, 좋은 글을 써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게 되고 이내 포기할 뿐이다. 그래서 결국 글을 많이 쓰지 못했다. 글쓰기는 그림처럼 수행의 결과로 나타나고, 나는 그 시간과 인내심을 가질 만한 위인이 못 된다는 걸 잘 안다.

그러나 형용하기 어려운 것들이 너무 많은 이 세상에서 현실을 본질적으로 꿰뚫어보고자 하는 시도를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글쓰기와 미술이 공통적으로 하는 일이다. '개체는 필설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미술은 '정언적 명제'를 회피하고 언어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면에서 글과 다른 의미가 있다고 본다.

Horn and Tail, Installation view at gallery Plant, 2010

고: 서울 전체가 뉴타운 광풍에 휩싸이던 수년 전, 영등포를 배경으로 만든 작품 '뉴타운 고스트'는 매우 도발적으로 보였다. 개발의 난도질에 대한 직설적 저항인가?

임: 나는 2005년부터 최근까지 영등포에 살았다. 한국 근대사에서 일종의 허브로 기능했던 영등포역 주변은 문학, 영화, 음악 작품에 수없이 등장할 만큼 많은 이야기와 나름대로의 특별한 정체성을 가지고 자리를 잡아간 곳이었다. 그런 영등포라는 지역에서 짧은 시간 살면서 접했던 한국 근대사의 전형과 인간 실존의 관계 같은 것에 대해 자연스럽게 의문을 품었던 것 같다. 영등포는 뉴타운 프로젝트에 포함되긴 했지만 단번에 개발되었던 것도 아니었고, 그에 대해 직설적 저항을 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저 개발지상주의의 한 지점일 뿐이었던 영등포에서 벌어지던, 그리고 앞으로 계속 벌어질 일들에 대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 같은 희망을 표현했다. 개발의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토지 자본주의, 성장 지상주의의 유령 같은 것이 적으로 간주할 수 없는 경계를 이루면서 스물거리는 것을 토해내듯 표현한 것이다.

개발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기억과 기록 따위는 배부른 소리일 뿐이라며, 배고픈 시절을 건너기 위해선 불필요한 일이었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모든 것이 생존을 위해 벌어진 일들이라는 구실에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지 않은가 생각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벌어졌고 되돌리기에는 이미 늦었으며, 어떤 행동도 별 소용이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에 이 작품을 하게 됐다.

'뉴타운 고스트'는 하위문화 코드를 차용하게 되면서 더욱 즉각적인 형식을 취한 작품이 되었다. 나는 작가로서 기억을 자극하는 이단적인 형식을 발명하는 데 관심이 있다. 기억하지 않으면 인간은 정복된다고 하지 않던가? 미술은 현상을 그저 필연으로만 치부해버리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편적 질서라는 것이 위로부터의 권력구조에 의해 학습되어 축조된 공감대라면 창작은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움직임이 아닌가? 그것에 동의한다면 문제제기를 표현할 이유도, 창작이 있어야 할 이유도 없다.

고: 급속한 개발의 후유증을 안고 있는 서울이나 여타 도시들의 현실에 대한 당신의 문제제기 방식에 가해지는 미학적 지지가 예술의 윤리적 책무나 외부인들의 '이국적 취향'에서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다면, 그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임: 예술의 윤리적 책무는 사실 많은 예술가의 발목을 잡고 있는 문제이다. 이에 대한 나의 입장은 '윤리학은 미래의 미학'이라는 말을 인용한 고다르의 시선에 가깝다. 진리(Truth)와 미(Beauty)라는 쌍마차에서 선함(The Good)과 아름다움(The beautiful)으로 이동한 감성적 판단 관계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말은 우리의 현실 자체가 어떻게 불화를 끌어안고 있는가를 들여다보는 일과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랑시에르의주장처럼 보이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감각의 재편성을 이루어야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실 영등포와 같은 자본주의의 폭력적인 도시개발 문제는 비단 한국만의 특수한 문제는 아니다. 이른바 세계화가 진행되는 어느 곳에서든 이러한 문제는 존재한다. 나는 거기서 소외되고 사적인 것으로 간주된 것들을 적극 조명하면서 지역적인 문제와 자연을 경제 개발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정치적 결정과 같은 것에 맞서고 있다고 생각한다. 작품을 통해 요구되는 '일단 멈춤'은 외부인들의 이국적 취향 혹은 내부인들의 문화적 우월성을 고무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사색을 불러일으킨다. 내 작업에 대한 미학적 지지가 있다면 그건 더 이상 이국적 취향을 취할 수 없게 된, 세계화가 가져온 획일화에 대한 분노 혹은 상실감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소위 말하는 탈근대화, 글로벌리즘, 신자유주의 등 우리 시대를 휩쓸었던 조류 앞에서 동시대 미술은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고: 당신의 작업은 어떤 보편타당한 지점으로 수렴되는 구조는 아니라고 본다. 당신 작업의 독특한 성격은 어떤 로컬리티의 미학을 견지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임: 나는 로컬리티의 미학과 그에 상응하는 글로벌리티의 미학에 대한 독자적인 존재성을 믿지 않는다. 다만 어떤 지배적인 보편성에 끊임없이 반대할 뿐이다. 그리고 독자적인 입장이 생성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개별적이고 지역적인 것이 갖는 일종의 텃세에 관심이 있다. 압축된 성장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일종의 자가당착이 발생한다. 예를 들면 오늘날 부정적인 것으로만 인식되는 '대충대충'과 '빨리빨리'에는 불복종의 생존 전략이나 꾀 같은 것도 담겨 있었을 것이라고 헤아리고 싶다. 나 자신도 그러한 부정적인 것들로부터 혜택을 입은 사람이라는 자의식이 크기 때문이다.

S.O.S. - Adoptive Dissensus, HD single channel video & sound projection, 46'13", Video documentation from performance, Seoul, Korea, Installation of 3 channel video projection 11'17", 2009

고: 당신의 정치적 견해와 입장 표명은 독재정권 체제하에 존재했던 민중미술을 생각하게 한다.

임: 민중미술은 위대했고 뜨거웠다. 당시의 역사적 배경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나는 그 시기에 주변인이었고 결국 유학을 결정했다. 지금 나의 작업은 민중미술이 출현했던 시기와 입장에서 비켜서 있다. 백남준이 '독은 독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말하면서 미디어를 다루는 자신의 방법론적 이유를 설명한 것은 인상 깊었다. 지금의 나는 군부 독재 정권하에서와는 다른 종류의 위기를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더 위험하고 교활해졌으며, 외부가 아닌 내 안의 적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그래서 내가 나를 죽여야 살지도 모른다.

위기는 상대가 위장해서 분명하게 구별해낼 수 없을 때 엄습하는 것이다. 지난번 <리버풀 비엔날레> 뉴커미션 작업으로 만든 '손의 무게'를 구상하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유령의 맞불은 유령이 되는 제식(祭式)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즉, 구분되지 않는 영역과 관계를 설정하는 시도를 감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허구보다 더 허구 같은 이 현실, 인간 조건 자체가 미장센이라는 것을 알고 메가폰을 직접 든 제사장이 되어 호령해야만 가능하다. 아니면 결국 그 현실의 현란함에 붙들려 자신마저 빠져나올 길을 잃고 마는 것이다.

고: 당신의 작품은 전도된 미학의 시대를 살고 있는 예술가의 자기반성 혹은 자기 고백인가?

임: 난 기본적으로 좀 비관주의자다. 그걸 극복하려고 자기반성과 고백을 통해 역으로 말을 걸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자기고백이나 자기반성 등은 공동체와 개인의 불가분의 관계를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SOS-채택된 불화'라는 퍼포먼스를 준비하면서 내가 떠올린 '너의 현실에 나는 어떻게 살아갈까'라는 질문이 그런 관계를 말해준다. 그건 너의 현실과 내가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원망과 좌절로 이어질지언정 포기할 수는 없는 연대감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주관적 독백처럼 즉각적으로 나타난 생각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먼저 자기반성을 거쳐야 하는 것도 그 이유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작품에서 추구하는 화법은 직설적인 고백은 아니다. 오히려 간접적이고 반어적인 침투와 설득의 화법을 추구한다.

나는 현실에 대한 강박이 있다. 무엇이 진짜인가? 반복된 학습은 가짜를 진짜로 믿게 하지 않는가? 야만으로 치닫는 현실은 무엇 때문일까? 잃어버린 사랑 때문에 버림받은 인간이기 때문일까? 우리는 정녕 근대화를 이루었던 걸까? 이 모든 질문은 내 삶의 조건에서 비롯했고 내 삶 자체, 그리고 작업 자체로 남아 있다.

Too Early or Too Late Atelier, The 7th Hermes Korea Art Prize, Seoul, Installation view at Atelier Hermes, 2007

고: 앞으로의 작업에서는 어떤 내용들을 말하고 싶은가?

임: 과거 나는 학습된 작가로서 학습된 대중을 상대했던 것 같다. 아무리 현대미술이 어렵다고 해도, 그들과 나 사이엔 어떤 학습의 교집합이 있었다고 본다. 나는 그 중복된 영역에 안주했던 것 같다. 서양 미술 담론의 지배를 받았고 그 맥락 안에서 활동했다. 나름대로 저항도 했지만 그 저항도 대상이 만들어놓은 헤게모니에 암묵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제는 그 헤게모니에서 더 자유로우며 내가 학습하지 못했던 것들에 새롭게 다가가는 작업을 하고 싶다. 더 정직하게 작업하고 싶다. 근대화 과정에서 생겨난 문화적 착종, 거기에 있는 원시적이고 본원적인 것, 특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특별하지 않은 것도 아닌 것을 추적하고 싶다. 우리가 보고 듣고 알고 있다고 믿는 것, 그 너머에 있는 것을 전하고 싶다. 미디어 아트의 본령이 거기에 있는 것 같다. 장르의 구분을 넘나들면서 헤게모니에 반대하는 것이 미술의 본질이고 내가 생각하는 정치이다.

New Town Ghost, Single channel sound & video projection, 10'45", 2005 ©Minouk L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