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의진과 천 개의 지팡이, 2021
2021 광주비엔날레 GB 커미션, 옛 국군 광주 병원
진행형 프로젝트, 장소 특정적 설치, 가변 크기

임민욱의 장소 특정적 신작은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 자행된 민간인 학살 생존자인 고(故) 채의진 작가의 지팡이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고 채의진 작가는 1949년 12월 24일, 문경 석달마을에서 벌어진 학살 현장에서 총격에 쓰러진 친형과 사촌동생의 시신에 가려져 기적적으로 생존할 수 있었다. 그는 당시 어머니와 누이까지 모두 아홉 명의 가족을 잃은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2016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에 앞장섰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지팡이들은 작업실 천장 위에 잠들어 있었다. 생전에 고인은 지팡이에 고통과 슬픔을 새겨왔고 그의 집안 곳곳의 모든 세간들은 마치 살아 있는 기관처럼 강렬한 울림을 전하는 듯했다. 고 채의진 작가가 남긴 노트에는, “슬픔과 분노, 고독과 저주로 더럽혀진 삶에 맞선 쓰라린 투쟁과 통한의 몸부림”(채의진 작가 노트)과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들”을 자신이 수집해온 나뭇가지와 뿌리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국은 복잡한 정치적 역사적 상황 속에서 과거사의 진실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했다. 책임자에 대한 처벌 역시 끝나지 않은 과제로 남아 있으며, 소외와 낙인의 시선은 오로지 민간인 피해 당사자와 유가족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임민욱은 고 채의진 선생의 피해자가 아닌 작가로서의 저항과 발화의 방식에 주목하고 작업을 만들어나갔는데, 사물의 배치와 장소적 개입을 통해 공포와 혐오, 분단국가의 현실에서 비롯된 이데올로기 과잉, 압축적 근대화로 인한 일상적 폭력을 넘어서고자 했다.
임민욱은 가족의 보도연맹(국민보호선도연맹) 사건의 증언을 접하고 나서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팀장으로 활동했던 한성훈 박사의 도움으로 고 채의진 작가를 만날 수 있었다. 이제 고인이 남긴 지팡이들은 사물에 새겨진 유언이자, 목소리의 주인공들로써, 끝나지 않은 전쟁, 인간의 버팀목이 되고자 하는 세번째 다리가 되어 질문을 연장한다. 이 질문에 대한 응답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가 아닌 수수께끼의 스핑크스를 기억해야 가능해질 것이다.

김선정과의 인터뷰

김: 고 채의진 작가의 지팡이는 2014년에 <관흉국 사람들_입을 수 있는 조각들>과 함께 처음 설치하셨었는데, 2020년에 선보인 <채의진과 천 개의 지팡이>를 기획하며 다르게 시도한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2014년부터 현재까지 작가가 다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면요?

임: 제가 내려놓지 못하는 질문 중에 이런 것이 있어요. 왜 어떤 것은 끝난 얘기라 하고, 어떤 것은 끝나지 않은 얘기일까? 왜 과거는 자유롭게 대할 수 없을까? 또 그것은 어떤 종류의 유산인가? 그 이유는 미래에는 과거와 무관하지 않은 어떤 패턴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저에게 미래는 앞에서 혹은, 허공으로부터 출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손 끝과 발 밑에 무언가와 접촉하는 감각의 문제이자 결국 나 자신을 이루는 알 수 없는 공포와 결핍에 대한 질문으로 연결돼요. 그 질문에 대한 단서는 과거가 쥐고 있을 것 같고 제대로 된 질문을 던져야만 해방될 것만 같은….

그런 의미에서 지팡이는 미제 사건의 아카이브 같고 불확실하고 오염된 서사에서 탈주하는 미래처럼 보입니다. 지팡이들을 계속해서 다르게 보여주는 방식을 모색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기도 합니다. 고 채의진 선생님은 한국전쟁 직전 발생한 민간인 학살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목숨값을 하겠다고 진실을 밝히고자 평생을 고군분투하셨습니다. 살아생전 그날의 기억을 매일 복기해야 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그분을 지탱해주던 지팡이가 저는 다른 차원의 증언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014년 광주비엔날레에서는 지팡이들을 구석을 이용해 세워놓았습니다. 앞쪽으로 쏟아져 나오거나, 혹은 사라지는 느낌을 주고자 했지요. 반면에 2020년 옛 전남도청 회의실 (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민주평화기념관 3관)에서는 지팡이를 하나하나 눕혔습니다. 고 채의진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이후 이 지팡이들은 돌봄이 필요했는데 광주비엔날레커미션 덕분에 지팡이들이 좋은 환경에 보관되고 미래에도 계속해서 소개될 수 있는 길이 열려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작가로서 ‘상처 입은 치유자’의 의미를 묻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로 연결되는, 작가로서 끝나지 않은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김: 작품 제목에서 ‘채의진’은 한국전쟁 직전 발생한 민간인 학살에서 기적적으로 생존한 뒤 한평생을 과거사 진상 규명을 위해 바치신 분이라고 알고 있어요. 고 채의진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던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임: 처음에는 아버지께서 종종 반복해서 되뇌이시던 과거의 기억에서 발단이 되어 국민보도연맹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어요. 그러고 나서 질문에 질문이 꼬리를 물어가던 와중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같은 곳에서 일하셨던 한성훈 박사님을 소개받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분을 뵙고 나서 답을 얻기는커녕 속수무책으로 경계가 뒤엉켜버렸어요. 개인의 일상과 현실 속에서 경험하던 근대성, 폭력, 장소, 시간에 대한 질문들이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 것 같았습니다. 한국전쟁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습니다. 결국 고 채의진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고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또한, 「진실의 힘」을 만나면서부터 이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시작되었죠. 그곳은 간첩으로 조작돼 고문받은 피해자들이 손해배상금의 일부를 출연해 만든 곳이에요. 만약 제가 2009년에 거기서 고문 피해자들의 기억과 증언을 지켜보지 않았더라면 다른 작업을 하지 않았을까, 종종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를 지금까지 이끈 것은 거창한 소명의식 같은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힘은 복잡하고 심오한 이론보다도 아주 단순하다고 할 수 있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해요. 들여다보기만 해도 바라보기만 해도 뭔가를 변화시키는… 피해자를 만나본 적이 없었으면 작가로서의 이런 분열과 갈등이 시작되지도, 질문이 생기지도 않았을 것 같아요.

김: 역사적인 요소를 작품에 담는 작가들은 그 역할의 무게가 엄청날 것 같아요. 개인적인 감정이나 주관은 작가로서 잘 다듬을 수 있는 재료가 될 수도 있지만, 작가에게 심리적인 부담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도전의 산이 높더라도 그 길을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 작가에게 중요한 자극이라고 여겼던 적이 있나요?

임: 질문하신 것처럼 도전해야 하는 산이 있었다면 차라리 선명한 목표가 있는 길이니까 그런 경우는 어떤 역할이나 무게를 기꺼이 지고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험난한 길을 뚫고 가겠다는 개척자의 의식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모든 작가가 그런 일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저 역시 그렇게 시작하지 않았어요. 그럼 왜 한국 현대미술계에서 비난받고 불편하다고 외면당할 수 있는 일을 감행했을까, 라는 질문이 올 것 같습니다. 그런데 눈감기엔 이미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분명한 것은 과거를 바꿀 수 없다는 점이에요. 무언가를 기억할 때와 장소와 시간의 관계를 사유할 때, 배제해야 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이 보편성과 객관성을 담보 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더더욱 분리와 결여를 바라보는 일이 아닐까요.

문경 석달마을 민간인 학살지를 직접 갔을 때, 증언과 애도의 관계, 당사자 문제 등을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었어요.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었는데 “이름 없는 아기 혼들 - 석달동 양민 학살 때 죽은 아기들을 생각하며”라는 고 류춘도 시인의 시가 거기에 새겨져 있었어요. 산부인과 의사로 살다가 일흔이 넘어서 시집을 낸 고 류춘도 시인이 세운 이 비석은, 1949년 12월 24일 마을 주민들과 함께 무차별 학살당했던, 이름도 얻기 전의 갓난아기들을 위해 자비로 세운 비석이라고 고 채의진 선생님께서 직접 설명해 주셨어요. 저는 한성훈 박사로부터 류 시인의 친필이 담겨 있는 시집 『잊히지 않는 사람들』을 선물받아 미리 읽고 갔었습니다. 그런데 마치 전쟁 한복판에 있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생생하게 들리는 듯해서 만나본 적도 없는 그녀가 써 내려간 비밀스런 사연들을 단숨에 읽었습니다.

그곳에서 뇌리에 박힌 장면이 하나 더 있어요. 바로 그 비석 앞에 놓여 있던 레몬빛 사탕 두 개예요. 코 끝에서 침샘으로 이동하는 파장 비슷한 것을 경험한 느낌이었어요. 이 사탕들을 놓고 간 누군가의 행위 또한 반복되어서는 안 될 과거를 기억하며, 동시에 다가올 미래의 안부를 묻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 또한, 고 류춘도 시인처럼 도울 수 있는 방법들을 찾고 싶었어요. 기억의 의미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고요. 기억은 과거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한성훈 박사는 증언의 의미가 바로 타인의 삶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한 분들에게 전하는 안부와 같다고 했어요. 그 말을 듣고 두려움이나 후회와 같은 감정이 사그라들어 마음이 편해졌어요. 작가가 걸어야 할 길 또한 안부를 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덜 힘드니까요.

김: 작품이 설치된 옛 전남도청 회의실은 5⋅18 당시 윤상원 열사가 사망했던 장소로서 역사를 기억하는 공간입니다. 작가님은 <채의진과 천 개의 지팡이>를 통해 민간인 학살과 5⋅18민주화운동을 어떻게 연결 짓고자 하셨나요? 또 설치를 위해 공간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을 텐데 그 경험도 듣고 싶어요.

임: 옛 전남도청 회의실이 전시 장소로 결정된 후 광주를 방문했을 때였어요. 자상과 화상이라 기록된 최후를 맞이한 윤상원 열사가 스러진 그 공간은, 그 어느 한 구석도 과거를 떠올리면 안된다는 듯 말끔히 단장한 채, 마치 새 건물과 같은 자태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건물 벽은 흰색 페인트로 칠했지만, 아직은 새 살로 덮히지 못한 상처처럼 희미한 총알 자국들, 재조사를 시작하기 위해 그 위로 표시된 동그라미들, 눈 감지 못한 윤상원 열사와 화염의 흔적이 마치 홀로그램처럼 떠다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도착했을 때 강당의 무대로부터 4미터를 떼어놓고 작품을 설치해야 한다는 조건에 대해서도 설명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주검이 있던 영역에 예를 다하지 못해 저주를 받을 수도 있다는 취지의 설명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또 한번 공간이 분열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뭔가가 머릿속에 콕 박혀 일종의 균열을 일으키는 듯 했습니다. 저는 공존에 대한 이해의 차원에서 “전시”와 “참여작가”의 의미를 재해석하려고 했었지만, “참여”의 의미는 분열된 것들 간의 포용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공간은 서로 다른 시간에 살았던 사람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세계까지도 연결하니까요. 보이지 않는 존재들에게, 그것이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어떻게든 응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윤상원 열사의 시신이 발견되었던 그 빈 자리에 음료수 한 병을 올렸어요. 그리고 삼배를 올린 뒤 지팡이를 하나씩 가져다 놓기 시작했습니다.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기리는 일이 오로지 당사자와 사건 장소, ‘누군가’의, ‘어딘가’의, 혹은 어느 특정 전공 분야의 일이 되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예술이 하는 일이 광주의 ‘그 날’, 옛 전남도청 회의실에서 벌어진 사건의 진실을 찾기 위한 일만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지요. 저는 민간인 학살과 5⋅18민주화운동의 연관성 만을 찾기보다는 공통적으로 함께 가고자 하는 방향을 깨닫고 싶었어요. 5⋅18민주화운동을 기억하는 일과 광주에서 전시를 한다는 의미는 궁극적으로 미래를 생각하고, 그래서 방향성을 찾는 힘을 끊임없이 환대하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Mr. Chai Eui Jin and 1,000 Canes, 2021
2021 Gwangju Biennale GB Comission, former Gwangju National Army Hospital
Ongoing project, site specific installation, dimensions variable

257_2021-gb-commission08.jpg
       
257_2021-gb-commission10.jpg
       
257_2021-gb-commission11.jpg
       
257_2021-gb-commission09.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