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칼이 덤벼들거들랑 하이에나를 보여주고,
하이에나가 덤벼들거들랑 사자를 보여주고,
사자가 덤벼들거들랑 사냥꾼을 보여주고,
사냥꾼이 덤벼들거들랑 뱀을 보여주고,
뱀이 덤벼들거들랑 막대기를 보여주고,
막대기가 덤벼들거들랑 불을 보여주고,
불이 덤벼들거들랑 강물을 보여주고,
강물이 덤벼들거들랑 바람을 보여주고,
바람이 덤벼들거들랑 신을 보여 주어야지”
- 아프리카 민요집에 실려있는 ‘덤벼들거들랑’ 전문(全文)

“If a jackal bothers you, show him a hyena,
If a hyena bothers you, show him a lion,
If a lion bothers you, show him an elephant,
If an elephant bothers you, show him a hunter,
If a hunter bothers you, show him a snake,
If a snake bothers you, show him a stick,
If a stick bothers you, show it a fire,
If a fire bothers you, show it a river,
If a river bothers you, show it a wind,
If a wind bothers you, show it a God.”
- a Fulani rhyme from West Africa

2015
2 canes
82 x 44 cm
Photograph: Sang Tae Kim

임민욱의 ‘미디어’ 아트

김남시 (이화여대 조형예술학부 교수)

메신저/천사/미디어

프랑스 철학자 미셀 세르는 『천사들의 전설』에서 거대한 흐름으로서의 세계를 떠올린다.

“바람은 대기에 공기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강은 육지를 가로질러 물의 흐름을 생기게 하고,
빙하는 산과 골짜기에 움푹한 길을 내서 단단한 강을 만들고, 비와 눈과 우박은 공기를
가로지르는 물의 흐름이고, 해류는 바다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물의 흐름이고, 화산은
육지에서 대기 쪽으로나 바다 속으로 향하는 수직적인 불의 흐름이고, 용암과 진흙의 흐름은
육지를 횡단해서 움직이는 각각 뜨겁고 차가운 액체의 땅이고, 표류하는 대륙은 불 위에서
떠다니는 육지의 융단이야…한 원소가 다른 원소들을 통과하고, 역으로 다른 원소들은
한 원소를 통과해. 원소는 견뎌 내거나 운반하지. 서로 상응하는 이 흐름들은 아주 완벽한
혼합이나 반죽을 만들어내고, 그래서 다른 장소들의 상태가 어떠한지 전혀 모르는 장소는
거의 없어. 흐름은 메시지를 통해 이러한 앎을 수신하지.”1

흐름을 통해 한 장소의 메시지를 다른 장소에 알려주는 존재를 세르는 메신저 혹은 천사라고 부른다. 그런데 바람이나 강, 비와 우박뿐 아니라 인간, 그리고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와 기술 장치도 이 메신저에 포함된다.

“천사(angel)란 말은 오늘날의 메신저를 뜻하는 고대 앙겔로스(angelos)에서 나온 것이죠. 주위를 한번 둘러봐요. 스튜어디스들과 조종사들, 무선 메시지들, 도쿄에서 날아와 곧장 리우데자네이루를 향해 출발하는 모든 승무원, 얌전하게 기수를 나란히 맞춘 채 죽 늘어서서 이륙할 준비를 갖춘 비행기 열다섯 대, 편지와 소포 그리고 전보를 배달하는 노란 우편 자동차, 직원을 호출하는 마이크 소리, 우리 앞을 계속 지나가는 이 가방들, 끊임없이 스톡홀름이나 헬싱키에서 방금 도착한 X씨 또는 Y양을 찾는 안내방송, 베를린, 로마, 시드니나 더반행 비행기에 오르라는 안내, 서로 마주치고, 지나가고, 서둘러 셔틀버스와 택시를 향해가는 저쪽 승객들, 야곱의 꿈에 나타난 사다리처럼 끊임없이 제 속도로 오르내리는 에스컬레이터…강철 천사들이 피와 살을 지닌 천사들을 실어 나르고, 피와 살의 천사들은 방송전파를 통해 신호 천사들을 보내거든요”.2

나는 지금까지 임민욱 작가의 작업이 세르가 말하는 천사의 일, 메신저로서의 ‘미디어(media)’ 작업이었다고 생각한다. ‘미디어’는 존재자들의 사이에 자리 잡고는 그들을 서로 매개해 흐르게 하는 것이다. 어떤 파동이나 물리적 작용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주는 매질(媒質), 살아있는 자의 세계를 죽은 자의 세계와 중재해 주는 영매(靈媒), 메시지나 정보를 우리 감각기관과 조우하게 해주는 매체(媒體), 이 모든 단어가 ‘medium/media’라는 어원을 공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임민욱은 이곳과 저곳, 이 존재와 저 존재 사이의 흐름을 만들어 그들을 매개/중재/조우하게 하는 작업을 해 온 ‘미디어’ 아티스트다. 안소연 기획자와의 인터뷰에서 임민욱은 “미디어 아트라고 불리는 것은…이 ‘경계’라고 부르는 정의와 범위에 침범해서 문제 제기를 하는 것”3 이라 말한다. 그녀의 미디어 아트는 자연과 역사, 현실의 존재자들이 경계를 넘어 서로를 향해 흐르고 만나게 함으로써 “다른 장소들의 상태가 어떠한지 전혀 모르는 장소는 거의 없는” 공동체를 호출한다. 다른 인터뷰에서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사라진 것, 비가시적인 것을 추적하고, 그들과 조우하고, 다시 한 번 그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4 이라고 정의했다. 사라진 것, 보이지 않는 것과 만나게 하는 방법 중 예술을 선택한 이유는 예술이 ‘흐르고 스며들고 사라질 수 있는 방법’ 이기 때문이다.

“나는 예술가라는 정체성을 따로 규정해놓고 고민하고, 그 사회적 책무에 대해서 계몽시키고자 작품을 하지는 않습니다. 나의 궁극적 관심은 실존이고 더 근원적인 것에 질문의 초점이 있습니다. 우린 어디에서 시작했나? 물인가? 불인가? 어떤 미생물인가, 별, 우주?, 슬픔, 따스함, 기억, 도무지 풀리지 않는 이런 미스터리 속에서 예술은 그것을 파헤치기보다 보호하는 유일한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알려고 진전하는 것과 달리 모르는 것이 있다고 진전하고 실천하고 투쟁해야 한다는 거죠… 내가 뭘 좀 안다고 재단하고 판단하고 가르기보다, 뭘 좀 알겠다고 정복하려 들기보다 작가이기에 흐르고 스며들고 사라질 수 있는 방법을 통해서 말이죠. 궁극적으로는 이렇게 해서 보이지 않는 것, 사라진 것과 만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5

흐름으로서의 미디어

흐르고 스며들어 사라지면서 보이지 않는 것, 사라진 것과 만나게 하는 일. 임민욱의 작업이 이런 의미의 미디어 작업이라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은 적지 않다. 작가의 거의 모든 영상 작품에는 흐름이 등장한다. 랩퍼를 태운 트럭이 도시를 흐르고 (<뉴 타운 고스트>(2005)), 계속해서 국가주의 시대를 옹호하는 택시기사의 차는 어두운 도심지의 거리를 흐르고 (<잘못된 질문>(2006)), 관객을 태운 배가 한강을 흐르며 ((2009)), 사람들의 손이 노래를 부르는 가수의 몸을 흐르게 하거나 (<손의 무게>(2010)), 죽은 자들의 유해가 실린 컨테이너가 대한민국의 고속도로를 흐른다 (<내비게이션 아이디>(2014)). 2채널로 김정일과 박정희, 남한과 북한의 두 정치가의 장례식 때 통곡하는 남북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절반의 가능성>(2012)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움직이는 것, 탈 것, 흐름에 관심이 많았는데 몸에서는 전이의 결과로 눈물이 흐른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무엇이 움직여 녹아 내리는 걸까…시체는 아파하지도 않고 눈물도
없고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살아있다는 것은 아픔을 겪는 것이고 측은지심이란
것도 짐승과 다른 인간다움의 측면에서 생겨나는 것이지요. 그런데 움직이는 것은 어디론가
흘러 들어가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상태를 만들어 전복성을 지니기도 합니다.
눈물은_넘치는 기쁨이나 아픔의 증거이고 상반된 두 개로도 작동하니까 남북한의 분단 상황에서는
역설적으로 서로의 눈물샘이 공동구역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눈물샘은 서로의 상실에서
솟구치고 고갈되며 끊임없이 싸우며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저는 두 눈물을
비교하며 공통된 것을 찾고 싶었습니다. <절반의 가능성> 2채널 프로젝션은 그런 눈물의
갈림길 같은 것을 형식적으로 표현해 본 겁니다. 왜냐하면 눈물의 가능성이 전복되어 흐르게
될 때를 상상해 보고 싶었으니까요. 통일은 하나가 된다기보다 흐름을 회복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 흐름은 아름다움과 밀접한 관계에 있고 그렇게 흐르는 눈물 속에서 우리가
어디서 비롯되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생각해보고 싶어 <절반의 가능성>이라는 제목도
떠올렸습니다. 흩어져있는 공동체의 눈물은 그리워서 흐르기 때문에 미래에는 막힌 것을
뚫어내는 힘으로 흘러 반가움으로 넘쳐날 수도 있다고 상상했습니다.”6

어디론가 흘러 들어가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상태를 만들어내는 흐름, 그것이 막히고 중단된 것을 뚫어내는 전복성을 지닐 것이라는 작가의 믿음은 다른 작업들에서도 읽을 수 있다. <포터블 키퍼>(2009)에 등장하는 오브제에는 깃털과 선풍기 프로펠러가 함께 결합되어 있다. 프로펠러는 보이지 않는 바람을 이동시켜 흐름을 만들어내는 물건이다. 앞 쪽의 대기를 뒤 쪽으로, 뒤 쪽의 공기를 앞 쪽으로 보내어 그를 통해 응축된 공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 대기의 흐름이 생겨나게 한다. 그 흐름은 평소에는 멈추어져 있던 것들을 움직이게, 심지어는 날아다닐 수 있게 한다. 예를 들어 새는 깃털을 매개로 그 대기의 흐름에 몸을 의탁해 이곳에서 저곳을 향해 날아다닌다. 한국 전쟁 중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300명의 실종자를 찾아 나선 프로젝트 <비(碑)300 – 워터마크를 찾아서>(2014)에서 참가자들은 작가가 미리 숨겨놓은 깃털 오브제를 찾아 눈 덮인 수도국지 주변을 돌아다녔다. 예민하게 대기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깃털은 사라진 영혼들의 상태를 수신하려는 미디어였으리라.

임민욱 작가가 즐겨 사용하는 열 감지 카메라는 또 어떤가. 그 카메라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체온을 가시화시킨다. 체온이야말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흐름이면서 그들의 살아있음의 메시지가 아니던가. 열 카메라는 시시각각 변하고 쉽사리 사라져버리기도 하는 체온을 색깔들의 움직임을 통해 가시화시켜 그 신체들의 상태가 어떠한지 알게 해준다. 작가는 “사방에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열, 모든 사물과 공간이 방출하고 있는 에너지 가운데 적외선으로 픽셀 하나하나에 담아내서 색으로 변환하는”7 열 감지 카메라를 예술이 지니는 감수성과 연관시킨다. 그것은 ‘빛’으로 상징되는 과학기술 문명과 소비사회 미디어 권력의 시각적 기술과는 달리 ‘촉각적’으로 감지되는 흐름을 환기시키기 위한 8 미디어였다.

컨테이너

관심을 갖고 지켜본 사람이라면 임민욱 작가의 작업에 유독 자주 등장하는 사물이 있음을 기억할 것이다. 컨테이너다. 2004년 마로니에 미술관에서 열린 <로스트 Lost?>(2004)에서 작가는 미술관 옆 공간에 빈 컨테이너 두 개를 연속적으로 설치하였다. 일종의 현장 임시 사무실 같은_컨테이너를 통해 전시 관계자, 행인, 노숙자, 예정 없는 대중들이 잠시 쉬었다 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것이다. 여기서 컨테이너는 그 기획전의 제목 에 어울리게도 임시 휴식 공간을 통해 사람들의 ‘흐름(rolling)’을 만들어내는 미디어였다. 본래 컨테이너는 먼 곳으로 화물을 운반하기 위한 물건이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나는 내 물건들을 큐빅 단위로 포장해 컨테이너에 실어 넣었다. 덕분에 베를린에서 생겨난 내 물건들이 바다를 건너 인천세관 마당까지 건너올 수 있었다. 컨테이너는 사물들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흘러가기 위해 필요한 사물들의 임시 거처인 셈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컨테이너는 물건들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다양한 용도를 지닌 장소를 제공한다. 공사현장 등에서 심심치 않게 마주치게 되는 컨테이너는 인부들의 휴식처이자 식당(함바식당)이기도 하고, 때로는 현장 업무를 위한 임시 사무소나 주거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2014년 광주 비엔날레에서 선보였던 <내비게이션 아이디>에는 컨테이너가 갖는 이 임시성과 이동성이 그 중심에 있었다. 작가는 희생자들의 유해가 실린 컨테이너가 고속도로를 거쳐 광주로 이동하는 장면을 인터넷으로 생중계하였다. 이념 대립과 전쟁, 분단이라는 역사의 잔여물에 영남과 호남 사이의 지역감정까지 엉켜 막힐 대로 막혀버린 흐름을 회복해보려는 상징적 시도였다. 광주에 도착한 두 대의 컨테이너는 비엔날레가 열리는 넓은 광장 한복판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운반을 위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사물이 흘러가기 위해 필요한 사물들의 임시 거처 컨테이너에 죽은 자들의 유해가 실려 있다. 장례를 치르지 못해 땅에도 묻히지 못한 유해들이 이삿짐을 옮길 때 사용하는 플라스틱 박스에 담겨, 제습제와 함께 앵글 위에 놓여 있었다. 나에게 이 컨테이너는 훼손된 제의처럼 보였다. 유해가 담긴 컨테이너란 그 자체로 죽은 자에 대한 제의적 엄숙함을 교란시키는 불경함이었다. 컨테이너의 임시성과 이동성이 유해들을 공사장에 적체된 물건이나 어딘가로 옮겨야 할 이삿짐처럼 보이게 했기 때문이다. 무엇이 유해가 자신의 장소를 향해 흘러가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가? 여기서 컨테이너는 죽은 자들의 흐름을 가로막고 있는 우리의 역사와 정치의 문제를 불편하게 가시화시킨다. 아직 이름도 다 밝혀지지 않은 이 유해들은 언제쯤, 컨테이너라는 임시 거처에서 풀려나 제대로 애도될 수 있을까?

방송국

이곳과 저곳이 서로를 향해 흘러감으로써 서로의 상태에 대해 알고 감지하게 하는 전령으로서의 미디어는 동시에, 그 흐름을 막고, 봉쇄하고 있는 것을 드러내면서, 궁극적으로는 그 막힘으로 인해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고 감각하게 한다. 나는 이러한 임민욱의 작업을 넓은 의미의 ‘미디어 아트’라고 칭했다. 이런 작업의 중심에 우리가 통상 ‘미디어’라고 부르는 기계장치들이 등장한다는 건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카메라, 컨테이너가 사물들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흘러가게 하는 것처럼, 카메라는 한 곳의 상태를 다른 곳으로 전송시켜 이곳에서는 보이지 않던 저곳의 모습을 보이게 하고, 저곳과 이곳의 조우를 가능하게 하는 ‘사이’의 장치다. <내비게이션 아이디>에서는 헬기에 실려 있던 카메라와 더불어 LTE 모바일폰도 “실종자와 사망자들의 떠도는 영혼을 위로하고 숨겨진 목소리를 강화하는”9 미디어로 사용된 바 있다.

신작 <허공에의 질주>에서 임민욱은 이 카메라가 중심에 있는 방송국을 설치했다. 부피가 사라져 파사드만 남은 컨테이너가 흰 무명 끈에 묶여 위태롭게 공중에 매달려 있고, 통나무 지미집에 매달린 카메라가 그를 향해 서 있다. 그 주위로 조명 스탠드, 집음기(集音機), 반사판 같은 방송 장비들이 깃털, 부표, 그물 같은 오브제들과 뒤섞여 둘러 서 있다. 저 카메라는 무엇을, 어떤 장면을 담고 있는 것일까. 그가 담아내는 장면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힌트를 얻으려면 다른 방으로 걸음을 옮겨 보아야 한다.

거기에는 1983년 KBS의 ‘이산가족찾기’ 생중계 방송을 편집한 작가의 영상 <만일의 약속>이 프로젝션 되고 있다. 2015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도 등재된 그 방송은,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례식 방송, 1984 굿모닝 미스터 오웰 백남준 위성 생중계 쇼와 더불어 임민욱 작가에게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긴 미디어 이미지 중 하나10 였다.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에서 카메라는 각 지역 방송국에 나와 사연판을 들고 가족을 찾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더듬어가며 그를 시청하던 다른 장소의 사람들에게 흘려 보냈다. 그 과정에 헤어진 가족의 생사는 물론 이름도, 나이도 모르던 사람들이 “화면을 보는 순간 느낌과 직감으로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11이 생겨났다. 한 장소의 상태를 다른 장소로 흘러가게 함으로써 서로 다른 장소들이 조우하게 하는 미디어가, 글자 그대로 현시되던 순간이었다. ‘미디어 아티스트’ 임민욱에게 이 방송이 깊은 기억으로 남게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허공에의 질주>에서 임민욱은 이 순간을, “아주 본능적이고 관능적인 미디어 공간의 이 역설적 경험”12 을 떠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 장소의 물건을 다른 장소로 실어 나름으로써 사물의 흐름을 만들어 내는 컨테이너는, 작가의 지적대로, “현재 유일하게 남북한을 오가는 사물”13 이기도 하다. 그런데 <허공에의 질주>에 매달린 컨테이너는 납작해져 버려 더 이상 어떤 물건도, 사람도 담을 수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주변에 포진하고 있는 나무뿌리, 우뭇가사리 등의 재료와 결합된 사람 형태의 오브제들과 더불어 화물숭배(cargo cult)에 등장하는 재단처럼 보인다. 그들은 저 컨테이너 재단 앞에서 무엇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그 컨테이너로부터 나오는, 너무도 미약한 나머지 잘 포착되지 않는 시그널이라도 붙잡아보려는 것일까. 컨테이너를 둘러싼 오브제들과 카메라는, 내게는 이산가족 생방송에서 확인했던 ‘미디어 공간의 역설적 경험’을 호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경험은 분단이라는 불가능한 경계를 불안정하게 만들면서 서로 다른 장소들이 서로를 향해 흘러 들어가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의 약속

임민욱의 미디어 아트는 우리가 처한 현실의 문제들에서 아름다운 가상의 세계로 눈을 돌리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흐름을 통해 막히고 고착된 것을 전복시키려는 그녀의 미디어 작업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결과라고 믿는다. 이번 전시에서 임민욱은 특히 분단이라는 상황에 주목한다. 임민욱은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의 미디어 이미지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적대를 통한 정체성 확립,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분단국가에서 작가란 무엇인가, 무엇을 그리워하는가, 미디어란 무엇인가”14 를 생각하게 했다고 말한다. 실지로 전쟁과 분단, 그로 인한 물리적, 이데올로기적 적대는 <비(碑)300 – 워터마크를 찾아서>의 실종자들의 직접적인 원인이면서, <내비게이션 아이디>의 유골이 아직도 컨테이너에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고, <절반의 가능성>의 눈물이 정치성을 띨 수밖에 없게 된 출발점이기도 하다. 분단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 말할 수 없게” 하고, ‘우리’의 ‘적’으로 규정된 자들을 환대할 수 없게 하며, “언어, 지역, 혈연, 국가 공동체의 가장자리에서 끊임없이 지워지고 보이지 않는”15 공동체에 대한 상상을 ‘만일(if)’이라는 가정의 형태로만 허용한다.

<통일등고선>은 역설적인 형태로 그 ‘만일’의 가정을 상상한다. 백록담과 천지의 등고선이 서로 마주하고 있는 위쪽에 허물어져 가는 남한과 북한의 건축물들이 서로 엉겨 붙어 봉우리를 대신하고 있다. “통일은 하나가 된다기보다 흐름을 회복하는 것”16 이라는 작가의 말을 떠올려보면, 흐름의 회복은 막히고, 고착되고 굳어있는 것들을 녹여 흘러내리게 하는 것부터 시작될 터이다. 이 점에서 <통일등고선>이 상상하는 통일은, 북한이나 남한의 정치권력이 내세우는 이데올로기로서의 통일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흘러 들어가는 흐름이 아니라 고착되어 있는 자신을 향해 상대가 흡수되어 오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통일의 상상이 한국의 역사에서 ‘통일’이라는 단어가 겪어왔던 의혹과 의심, 불온과 혐오의 의미망들로부터 자유롭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통일을 바란다면 우리는 통일을 재발명 해내야 할 것이다. 그 과정은 결국, “언어, 지역, 혈연, 국가 공동체” 바깥에 있는 타자들을 환대하는, 그를 위해 ‘일치하지 않는 존재들’과의 불화를 감수할 수 있는 공동체를 상상하는 일에 다름 아닐 것이다. 대형 컨테이너 도어를 쌓아 제작한 <시민의 문>의 열려진 문은 나에게, 도래하지 않은 그 미지의 공동체를 향한 조심스럽지만 강고한 환대의 제스처로 보인다. 예술은 그렇게, ‘만일(if)’을 ‘약속(promise)’할 수 있는 공동체 구성원들을 발명해내는 상상의 장소가 된다.

1 미셀 세르 『천사들의 전설』, 이규현 역, 그린비(그린비라이프), 2008, p.35.
2 미셀 세르 『천사들의 전설』, 이규현 역, 그린비(그린비라이프), 2008, p.15.
3 작가 인터뷰 “ ‘만일(萬一)의 약속’: 슬픔으로 유대하는 공동체” 안소연.
4 작가 인터뷰 “Discovering the Past” Emily McDermott, Interview Magazine, 2015년 5월호.
5 작가 인터뷰 “폐허의 현장에서 꿈꾸는 절반의 가능성_설치미술가 임민욱” 김명숙, 월간미술 2013년 1월호.
6 앞의 글.
7 작가 인터뷰 “임민욱: 예술과 정치 사이 입양된 불일치” 주혜진, 경향 아티클, 2013년 7월호.
8 작가 인터뷰 “폐허의 현장에서 꿈꾸는 절반의 가능성_설치미술가 임민욱” 김명숙, 월간미술 2013년 1월호.
9 작가 인터뷰 “The Belated Funeral as Performance: A Dialogue with Minouk Lim” Stuart
Comer, Jenny Schlenzka, 2013년 1월 http://post.at.moma.org/content_items/533-
the-belated-funeral-as-performance-a-dialogue-with-minouk-lim.
10 임민욱, 작가 노트.
11 작가 인터뷰 “ ‘만일(萬一)의 약속’: 슬픔으로 유대하는 공동체” 안소연.
12 앞의 글.
13 앞의 글.
14 앞의 글.
15 앞의 글.
16 작가 인터뷰 “폐허의 현장에서 꿈꾸는 절반의 가능성_설치미술가 임민욱” 김명숙, 월간미술 2013년 1월호.